'2012 부산비엔날레' 특별전이 열리는 부산진역 전시장에서 음주 폭력 등 러시아에 대한 편견을 주제로 한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여기 좌천아파트가 어디예요?"

부산 동구 좌천동 좌천아파트로 가는 길. 차 한 대만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도로를 타고 꼬불꼬불 엮인 산복도로를 10분 정도 이리저리 헤맸다. "저기 뒤쪽에 있는데…. 가는 길이, 설명하기가…. 일단 위로 계속 올라가 봐요."

언덕처럼 가파른 경사를 타고 올라가니 드디어 낡은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 입구에 'N°18'이라고 적힌 큰 나무궤짝 안내판이 '2012 부산비엔날레' 전시장임을 확인해 준다. 입구에서부터 5층 전시장까지 또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아파트 1층에서 5층 전시장인 18호까지 걸어 올라가는 도중에 왜 이곳에 전시장이 있는지를 알아챌 수 있다. 재건축 직전의 낡고 어두컴컴한 복도와 오래된 나무판으로 된 현관문(대부분의 세대는 철제 현관문으로 교체했지만 일부 집들은 오래된 나무 현관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중앙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보이는 공동화장실(교체공사가 완료된 수세식 화장실 칸칸마다 어느 집 화장실인지를 알리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낡은 시멘트 벽면, 녹슬어 아예 떨어져 나가버린 계단지지대 등. 전시장까지 가는 길에 관람객은 좌천아파트의 '역사'와 대면한다. 좌천아파트는 부산의 '1세대' 아파트다. 피란민들과 도시노동자들을 수용했던 부산의 대표 주택가는 이제 낡은 근대유산이 된 것이다.

올해 부산비엔날레 전시작 중 하나인 N°18은 굳이 이 낡은 근대건축물까지 오라고 관람객들의 수고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부산의 역사를 되돌아보게끔 만든다. N°18은 메리 엘렌 캐롤의 공간설치 작품으로 작가는 좌천아파트 내 한 집을 전세 내 미술전시장으로 꾸몄다. 인근 주택가 옥상에는 화단도 꾸며 산복도로의 오래된 집들 사이에 위치하게 한다. 이처럼 지난 9월 22일부터 오는 24일까지 열리는 2012 부산비엔날레의 작품들은 '오래된 도시' 부산의 고민거리 중 하나인 도시재생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낡은 역사성을 문화콘텐츠로 재현하면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 '낡은' 근대건축물, 부산의 역사·얘깃거리 새로 만든다

- 부산비엔날레, 근대유산들 활용 전시…좌천아파트 예술실험 인터넷 생중계
- 부산진역 미래의 공간으로 거듭나
- 행사 끝나면 폐쇄·주거지 회귀 운명, 상설 문화예술공간으로 리디자인해야

2012 부산비엔날레 출품작 메리 엘렌 캐롤의 'N°18'은 '부산 1세대 아파트'인 동구 좌천동 좌천아파트 18호에서 벌이고 있는 공간설치 작업이다. 아파트 한 집을 전세 내 합판과 스티로폼 등으로 4평가량의 공간을 새로 만들었다. 이동하기에도 비좁은 이 공간에는 큰 책상과 의자, 취사가 가능한 아일랜드 식탁이 마련돼 있다. 천장에는 비디오카메라가 장착돼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부산비엔날레의 주 전시장인 부산시립미술관과 인터넷으로 실시간 생중계한다.

■1세대 아파트 '부산의 역사' 품다

	부산 동구 좌천아파트 18호에서 관람객과 배움위원이 '사진으로 바라보는 부산'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좌천아파트 18호에서는 매일 한 차례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작가, 교수, 좌천동 주민 등이 참여해 철학 물리학 예술 동네이야기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다. 지난 4일 이곳에서는 '사진으로 바라보는 부산'이란 주제의 프로그램이 열렸다. 진행자는 부산비엔날레 배움위원(신청으로 선발된 일반 시민)인 설다혜(17·부산 명호고 2년), 권하경(16·양산 물금고 1년) 양. 올해 부산비엔날레는 전시자와 배움위원이 협업해 전시를 완성하는 시스템으로 가동되고 있다.

배움위원으로 참가한 두 여고생은 부산을 찍은 사진을 주제로 관람객들에게 '미션'을 부여했다. 용두산 공원의 부산타워, 광안대교, 산복도로, 광복동 먹자골목, 경성대 앞 문화골목 등 부산에 관한 10여 장의 사진을 보여주더니 가본 곳 중 가장 인상 깊거나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장소의 사진을 고르라고 한다. 선택한 사진 위에 투명필름을 얹고 사진을 그림으로 다시 그린 뒤 각자의 사연을 적어넣는 과제였다. 할머니집 가는 길에 보았던 광안대교, 엄마와 함께 간 보수동 책방골목, 다른 지방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준 부산타워, LP판이 가득한 경성대 앞 문화골목에서 '아바'의 올드팝송을 들었던 일 등 각자의 그림과 사연이 새겨진 투명필름은 18호 유리창면에 붙여졌다. 사연에 대해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다과도 함께 했다.

이렇게 예술실험을 하니 좌천아파트는 더이상 그냥 낡고 오래된 아파트가 아니었다. 역사와 이야깃거리가 있는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장소가 된 것이다.

■근대의 상징 기차역

	부산진역 기차역의 풍경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부산비엔날레 출품작품 '트레인스포팅'.

좌천아파트에서 내려와 부산진역으로 가면 또다른 근대건축물을 활용한 전시장이 하나 더 나온다. 부산진역사에서도 2012 부산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기차역의 풍경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수니 마코소브의 '트레인스포팅' 등 여러 작품들이 낡은 건물 속 곳곳에서 관람객들을 맞는다.

1905년 개통돼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굴곡의 한국(부산) 역사를 품은 부산진역사는 2004년 여객업무를 중지하고 화물취급 전용역으로 전환됐다. 이제는 일반인에게는 폐쇄된 이 공간이 비엔날레 기간에 한시적으로 전시장으로 개방된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2층 오른쪽 벽면에 새겨진 전시의 주제문부터 눈에 띈다. '기억을 가진 공간의 재탄생-과거의 기억 중 현재에 재현되지 않은 것들은 회복이 불가능하다'. 낡은 역사를 버릴 게 아니라 현재에 맞게 재생해야만 의미가 있다는 주제의식이 드러난다.

	부산비엔날레 출품작 'N°18'은 부산의 '1세대' 아파트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부산의 역사를 대면하게 한다. N°18 전시장인 동구 좌천아파트 18호의 외부 모습.

전시 시작점에 거대한 연대표가 펼쳐져 있다. 올해를 기점으로 향후 90여 년간의 가상 미래가 담겨 있다. '2015년에는 부산진역이 부산 문화예술의 중심이 되는 '문화역'으로 개관하고, 2050년에는 남북통일이 된다. 2063년에는 로봇화가가 첫 개인전을 부산진역에서 열고, 2080년에는 우주여행이 대중화된다. 부산진역 개통 200년이 되는 2104년에 부산진역사에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경제개발과 군부독재,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파동, 통일 대한민국 시대 등 200년의 역사를 총괄하는 기념전이 열린다'. 근대의 공간이 현재를 관통해 미래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근대유산 활용 걸음마 수준

	좌천아파트 18호의 내부 모습.

좌천아파트나 부산진역사는 부산비엔날레가 끝나면 또다시 폐쇄되거나 일반 주거지로 돌아간다. 일회적 장소 활용에만 그치는 것이다.

그간 이처럼 근대유산을 활용한 다양한 문화적 시도가 있어왔지만 상설 활용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부산 인근 백제병원 건물. 1920년께 건립된 부산 최초 근대식 민간병원으로 중국 기생집, 일본군 장교숙소 등으로 이용됐던 백제병원 건물에서 지난 2009년 '도시는 재생을 꿈꾼다' 등 몇 차례 전시회가 열린 게 다였다. 아예 건물이 헐린 경우가 더 많다. 남선창고, 삼일극장, 옛 부산유치원 터 등이 그랬다.

피난의 도시, 경제개발의 도시, 이제는 제조업이 빠져나간 쇠약한 원도심의 도시. 부산이 가지는 이러한 역사성을 문화콘텐츠로 재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부산발전연구원 윤지영 연구위원은 "영국의 테이트모던 등 선진국 도시재생 사례는 단순히 근대건축물을 재활용한 게 아니라 그 곳의 역사적 의미를 끌어내고 스토리텔링을 발생시킴으로써 성공했다"며 "재생이란 기존의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 뭘 짓는 게 아니라 과거를 기반해 문화 등 새로운 콘텐츠로 '리디자인'하는 개념으로, 이를 도시재생이 화두인 부산이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외국 도시재생 사례들

- 英 테이트모던미술관, 발전소 건물 리모델링
- 獨 함부르거반호프미술관 등도 유명

	발전소를 리모델링해 만든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

선진도시들은 기능을 다한 낡은 과거의 근대건축물들을 문화공간으로 상설 '재활용'하고 있다. 건축물을 완전히 부수고 재건축하는 게 아니라 간단한 리모델링만 거쳐 그 역사성을 간직한 채 문화콘텐츠를 추가, 사람들의 발길을 다시 잡고 있는 것이다. 이들 공간은 도시재생의 해법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보여준다.

문화콘텐츠로 도시재생에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는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미술관이 빠지지 않는다. 국립미술관인 테이트모던은 1982년 폐쇄된 발전소 건물을 리모델링을 거쳐 미술관으로 완성됐다. 템즈강 강변에 위치한 테이트모던은 낡은 굴뚝과 벽돌, 창문 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낡고 을씨년스러운 굴뚝공장이지만 내부에 들어서면 회화 사진 설치작 등 작품들로 화려하다. 시민들은 미술관에 작품을 보러, 또는 미술관 앞 잔디밭에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몰려든다.

독일 베를린의 함부르거반호프미술관은 이름(기차역을 의미하는 반호프)처럼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둥근 유리천장과 높은 층고 등이 과거에 기차역이었음을 연상케 한다. 프랑스 오르세미술관도 기차역을 리모델링해 개관한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 카를스루에의 ZKM은 1차 대전 당시 군수품공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개조해 만든 첨단매체예술센터다. 뉴욕의 첼시 역시 값이 싼 오래된 건물에 작가들의 작업장과 갤러리들이 들어서 지금은 세계 유수의 갤러리들이 집결해 성공사례가 되고 있다.

일본 요코하마도 1950년대 건립된 선박회사의 물류창고를 현재는 요코하마시의 '문화예술창조도시' 정책에 따라 '뱅크아트 스튜디오'로 개조해 문화예술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N°18 전시장인 동구 좌천아파트 18호의 내부 모습. 산복도로와 광복동 먹자골목 등을 그린 투명필름이 18호 유리창에 붙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