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몰라보게 변해가는 간월재. 임도 개설 이후 듬성듬성해진 억새밭에는 잡풀이 무성지고, 고갯마루에는 최근 울주군 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매점이 들어섰다.

- 10여년 만에 모인 지킴이들 회상
- 노점상 늘어나자 2004년부터 단속
- 철거공포와 추위에 떨던 고달픈 인생들
- 3년 전 폐쇄 뒤 판매장으로 재정비돼
- "보부상들 통탄할 일" 목메인 한마디

■2000년 정초에 일어난 간월재 억새 불

1998년, 푸른 '가빠'를 덮어 쓴 포장마차가 간월재(907m) 고갯마루를 올랐다. 포장마차 주인 동금이 엄마는 잿길 꼭대기에 있는 '참새미'에서 얼음을 깨 물을 받은 뒤, 멸치를 우려낸 다시물에 어묵을 데워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 움막포차를 연 첫날은 종일토록 커피 한 잔밖에 팔지를 못하였다. 그로부터 2년 세월이 흐른 후 차량 통제가 풀리면서 산행객이 늘어나자 낯선 장사꾼들이 하나둘 올라왔다. 자리다툼은 치열했다.

2000년 밀레니엄 정월 대보름달이 뜨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간월재 임도는 새천년 대보름달을 보려고 몰려든 차량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매월 10일에서 15일 사이면 간월재에는 뜨는 달과 지는 해가 하늘에 공존하였다. 하늘에 두 개의 불덩이가 환상적으로 떠있는 것이다. 잠시 후 저녁놀 언뜻 기우는 언덕배기 억새밭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강풍을 타고 억새밭으로 번진 불은 달집처럼 훨훨 타올랐다. 간월재 초소를 지키던 산불감시원이 득달같이 달려갔고, 장사꾼들은 불을 끄기 위해 메뚜기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거대한 불기둥을 두고 소원을 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늘을 뚫는 불길이라 외치는 구경꾼도 있었다. 잠꼬대 같은 말이지만 누구든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탄성이 절로 터졌을 것이다. 이날 화재로 장사꾼들의 움막포차는 숯검정이 되고 말았지만, 잿더미 억새는 신통하게 잘 자랐다.

■한철 팔아 네 철을 먹고 사는 메뚜기 인생

	쑥대밭 간월재. 출입이 금지된 억새밭에 착륙한 패러글라이더. 지난해 시행한 억새군락지 조성사업을 무색하게 한다.

떠돌이 시인은 간월재에서 한철을 풍미했던 메뚜기 인생들을 수소문하였다.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잡상인을 없애기 위해서 2009년 울주군청에서 임도 진입을 차단하면서 장사를 그만두게 된 메뚜기 장사꾼들의 행방이 줄곧 궁금하던 터였다.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은 동금이 엄마를 비롯하여 당시의 장사꾼들을 간월재에서 만나기로 언약을 하였다. 20년 경력의 베테랑 산불감시원이었던 윤태록(74세) 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올랐고, 메뚜기의 대모로 알려진 동금이 엄마와 떠돌이 시인은 콩죽 같은 비지땀을 흘리며 잿길을 내쳐 걸었다.

활공장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던 왕고참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녁은 밥은 굶을지언정 패러글라이딩을 하지 않으면 날갯죽지가 욱신거리는 날꾼이었다. 상승기류가 좋은 바람만디 간월재는 패러글라이딩의 천국이었다. 바람 방향을 묻는 문의 전화에 장사꾼들은 천기를 누설하는 기상 정보원이 되어 주곤 하였다.

아이스크림 총각, 장사 수단이 타고난 수아 아줌마와 진수 법사, 상봉이 아저씨, 부산상회 부부, 간월재 지킴이 삼촌, 그리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산을 오르는 '매일조'도 보였다. 이녁들 모두가 간월재의 터줏대감들로, 질경이처럼 간월재를 지켜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평소 궁금했던 엄대장과 방도사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야생마 엄대장은 몇 해 전에 고인이 되었고, 스스로 득도(得道)한 방도사는 머리를 깎고 신불산을 떠났다.

한편 간월재 진돗개 '상식이'와 '삼순이', 그리고 억새밭 들고양이 '다옹이'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간월재의 오랜 식구였다. 동금이 엄마는 "차가 고장나던 날, 황소만 한 두 진돗개가 어두운 밤길을 앞장서 간월산장까지 데려다 주었다"며 종적을 감춘 두 진돗개를 애타게 찾았다. 열다섯 살인 '다옹이'는 고양이로는 할아버지뻘로, 간월재 산행객이 던져주는 음식물로 연명했다.

■골병든 돈을 벌어야 했던 간월재 잡상인들

	간월재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했던 동금이 엄마는 "한 철 팔아 네 철을 먹고 사는 메뚜기 인생이지만, 쫓기는 것 빼고는 세상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오랜만에 간월재에 오른 장사꾼들은 감회에 젖은 표정이었다. 골병든 돈을 벌어야 했던 메뚜기 인생들은 아무래도 추위에 떨었던 기억을 잊지 못해 하였다. 안방처럼 포근하다가도 매서운 고갯마루로 돌변하는 곳이었다. 사월 반소매에 얼어 죽고, 유월 반바지에 저체온증에 시달리는 곳이 간월재였다. 이곳에 추모비가 있는 '부산 청년' 역시 오월에 반소매 차림으로 얼어 죽었다. 산불 초소지기 윤 씨는 "그나마 장사꾼들은 오뎅 국물을 데우는 불이라도 끼고 있었지만, 나는 칼바람 부는 초소에서 오지게 떨었다"며 힘겨웠던 당시를 회상하며 희끗희끗한 물머리를 저었다.

초소가 있었던 활공장에 올라선 윤 씨는 "강풍에 초소가 날아다녔더랬다"며 자신이 근무하던 초소가 종잇장처럼 날아갔던 골짜기를 가리키며 멋쩍게 웃었다. 떠꺼머리총각 때부터 간월재 억새를 베어 날랐던 윤 씨는 억새 다발을 진 지게가 휘청거리곤 했다고 엄살을 떨었다. 곁에 있던 간월재 지킴이 삼촌이 "연중행사로 날아다니던 초소를 임도에 잘 모셔 두었다"고 화답을 하자 함께 있던 수아 아줌마가 "내 파라솔도 날아다녔다"고 맞장구를 쳐 한바탕 웃었다.

■쫓기는 것 빼고는 세상 없었다

한때 신불산 정상에 움막포차를 차렸던 수아 아줌마가 당나귀 등에 막걸리를 지우고 산꼭대기를 올랐던 고생담을 늘어놓자, 앙숙이었던 상봉이 아저씨가 눈꼴시어 했다. 척박한 기후만큼이나 간월재 장사는 산 아래 세상보다 더 치열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출근하지 않으면 좋은 자리를 서로 노려 주도권을 빼앗겼다. 모르는 사람이 트럭을 몰고 올라오면 같은 무허가라 뭐라고 말을 못하고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깡패 출신이 온 적도 있다. 상봉이 아저씨가 "없는 나도 먹고살아야겠다는 데 할 말이 없더라"고 당시를 떠올리자, 부산상회 바깥양반이 "나중에는 횟집까지 생기더라" 며 한술을 더 떴다. 이녁들의 말마따나 장사를 막을 권한이 없었던 것이다.

장사꾼이 늘어나자 2004년부터는 모두가 쫓기는 신세가 되기 시작하였다. 울주군의 철거 계도장이 산불감시원 윤 씨 편으로 오곤 했다. 단속 권한이 없는 윤 씨는 해라 말라 말은 안 해도 늘 미안해하는 투로 쪽지를 내밀었다. 버티면 산림과 공무원이 찾아왔다. "철거해라. 벌금 날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편하게 살고 싶어도 쫓기는 인생이라 항변할 입장이 못 되었다. 양성화시켜 장사를 해보려 해도 시설물이 없는 억새밭이라 임대계약서나 사업자등록증을 낼 수가 없었다. 간월재 장사꾼들에게는 봄은 단속의 계절, 여름 가을은 쫓기는 계절, 겨울은 추위와의 전쟁이라 사계절 모두가 힘든 연속이었다.

무엇보다도 간월재에 들어선 매점을 본 장사꾼들은 "한 철 팔아 네 철 먹고 사는 우리를 쫓아내더니 결국…" 목이 메인지 끝내 말끝을 흐렸다. 범 없는 동굴에 토끼가 왕이라고, 간월재 잡상인을 쫓아낸 울주군은 매점을 세워 돌미역 따위의 특산품을 선보일 생각이다. 과거 간월재에는 언양 소장수, 울산 소금장수, 서생 미역장수, 밀양 목기꾼 같은 보부상들이 자주 넘나들었다. 오지랖 넓은 보부상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돌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멱살잡이를 할 일이다. 그러나 발밑에 깔린 무지개 운무를 본 메뚜기 인생들은 "저 운무를 보며 뜬 시름을 달랬다. 쫓기는 것 빼고는 세상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