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문 지면에서 실린 새 영화 소식을 읽고 있자니 4, 5월에 개봉하는 한국 영화는 죄다 '성애' 영화이다. 남녀 배우의 전신 누드에 체모까지 볼 수 있다는 '은교', 여배우의 전신 누드가 나오는 '간기남', 팬티만 입은 채 영화 내내 여배우가 다리를 노출하고 있다는(거기에 상반신 속옷은 생략했다는 친절한 코멘트까지 덧붙은) '내 아내의 모든 것', 연기파 중년 여배우와 젊은 남자 배우의 베드신이 관건이라는 '돈의 맛'. 이미 개봉된 영화와 개봉 예정작이 뒤섞여 있는 이 영화들에 대한 기사는 예비 관객들을 순식간에 1980년대로 돌려보낸다.

제5공화국의 3S 정책에 따라 에로 영화 전성시대였던 1980년대의 한국 영화는 온통 성(性)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에로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색채의 영화도 광고를 거치면 에로 영화로 돌변하곤 했다. '뼈와 살이 타는 밤', '무릎과 무릎 사이'같이 노골적으로 "나, 이런 영화예요"라고 자기 정체성을 표방한 영화도 있었지만 때로는 홍보 때문에 난데없이 빨간 딱지가 붙는 영화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장호 감독의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의 광고 카피는 "성기 완전 노출 영화"였다. 아연실색한 제작진의 항의에 홍보사 측은 "아역이었던 안성기 씨가 성인으로 노출된 첫 번째 영화"라고 해명했다 한다. 실소로 기운이 빠져 전의조차 상실케 하는 전략이라 하겠다. 1980년대니까 가능했던 일이다.

1990년대에 나는 많은 유럽 작가 영화를 주로 서면 뒷골목에 있는 재개봉관에서 보았다. 액션 영화나 에로 영화가 주요 상영작인 이 극장에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성의 증명'과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퍼블릭 우먼',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 다큐멘터리인 '마돈나의 진실 혹은 대담' 등은 에로 영화로 포장되었다. 감독이 누구인지 그 영화들이 실제로 뭘 담고 있는지는 하등 중요치 않았다. 작가·예술 영화로 소개하느니 차라리 섹슈얼한 영화라고 선전하는 게 흥행에 도움이 되던 시절의 얘기다.

2012년인 지금. 1980, 1990년대 저 기억들을 불러내는 것은 광고가 아니라 언론이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제작되는 광고가 의도된 오해를 자청하는 일은 오히려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일간지의 영화 소개 기사와 인터뷰는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 영화에 대한 오해를 양산하려 드는지 알 수가 없다. 독자와 예비 관객의 주된 관심이 선정적인 것에 있다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이며, 무엇보다 언론 주체의 관심이 오로지 선정적인 것에 쏠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이를 이해할 다른 방도가 없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영화 중 명백히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에로틱한 영화를 만드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가 저 너머를 가리키고 있는데 눈앞의 엉덩이만 쳐다보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영화를 호도하는 그런 영화 소개는 그 영화들을 서로 엇비슷한 것으로 납작하게 눌러버린다. 그러고 나면 우리에게는 누구의 노출을 볼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영화의 탄생 이래 영화 광고가 그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즘 우리를 둘러싼 매체환경들은 영화를 '오해'하는 데 이바지한다. 인터뷰 자리에 불려나온 그 뛰어난 배우들은 천박한 호기심뿐인 질문들을 왜 거부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영화평론가·부산대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