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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강 건너편에서 본 촉석루 전경. 강물과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우뚝 선 촉석루 전경은 과히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3대누각으로 불릴 만하다. |
진주는 교육 도시다. 인구 3명중 1명이 학생이다.
남명 조식의 학풍이 면면히 이어져 온 학문적 토양은 서부경남 가난한 수재들에게 좋은 자양분을 제공해왔다.
진주에서 길러진 인재들은 한국사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왔고, 그래서 "조정인재의 절반이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절반이 진주에 있다"는 말이 나왔다.
진주는 또 문화 예술 충절 기개의 도시이기도 하다. 각종 전통문화가 잘 보전돼 있고, 그 저변에는 논개와 산홍으로 대변되는 충절의 문화가 흐른다.
조선말기 수탈당하고 차별받는 농민과 백정들의 민란과 인권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불을 지핀 곳도 진주다.
남도의 푸른 핏줄 남강을 끼고 있는 진주는 시인의 말처럼 석류꽃보다 더 붉고,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논개의 핏빛 정열로 인해 세인의 가슴에 '진주=충절'로 각인되고 있다.
#중학교보다 고교가 더 많은 도시
2002년 12월말 기준 진주시 인구는 34만816명이다. 이 가운데 학생(유치원생~대학생)은 11만2859명. 전체 인구의 33.1%가 학생층이다. 대학도 6곳이나 된다. 인구 100만이 넘는 울산시에도 대학은 4곳이다.
진주가 교육도시라는 것은 중학교(19개교)보다 고교(22개교)가 더 많은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서부경남의 우수한 중학졸업생들이 진주로 몰린다. 초중학교는 진주시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어야 하지만 고교진학은 시군 경계를 넘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학교보다 고교수가 더 많은 기형적 현상을 보인다.
4월 현재 진주고 재학생 1059명중 30%가 비진주지역 학생이다. 대아고 역시 1165명중 18%가 타지역 학생이다. 대아고의 경우 사천(75) 산청(43) 하동(38명)을 중심으로 남해 고성 합천 함양 통영 의령 등지의 유학생이 많다.
진주고와 대아고 관계자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심할 경우 진주와 비진주 학생이 5대5의 비율을 보일 정도"라며 "지금은 내신문제 등도 있어 진주 유학비율이 많이 떨어진 편"이라고 밝혔다.
진주시교육청 이기원 교육장은 교육도시 진주의 배경으로 △지리적 특수성 △우수한 학교 △역사·문화적 전통 등 세가지를 꼽았다.
이 교육장은 "진주는 옛날부터 지리산 아래 서부경남 농촌지대의 중심도시였으며, 도청이 소재했고, 남명 조식의 학풍, 공장굴뚝을 보기 어려운 문화적 풍토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자연적으로 교육도시가 형성됐다"고 분석했다.
이 교육장은 특히 진주사범학교(현 진주교대) 진주농고(진주농전을 거쳐 현 진주산업대) 진주고 등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친 우수 학교의 존재도 교육도시 진주의 이미지를 드높이는데 큰 몫을 했다고 강조했다. 아직도 교육계에서는 진주사범 학맥을 일컫는 이른바 '진주 마피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교육도시는 역설적으로 진주의 고민이기도 하다. 공장굴뚝이 없는 양반도시 학문도시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 진주시 자료에 의하면 최근 3개월간 6748명의 시민이 진주를 빠져 나갔다. 이들 가운데 44%가 서울 부산 등 5대광역시로 일자리를 찾아나갔으며 주로 20~30대 젊은 층이다. 재정자립도 36.1%는 교육도시 진주의 뒷면이다.
#양귀비꽃보다 붉은 충절
진주성 정문 입구 남강변엔 시비가 하나 있다. 수주 변영로 선생의 유명한 시 '논개'이다.
논개는 의기(義妓)다.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싸움으로 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의 푸른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논개는 쌍가락지 낀 손으로 왜장을 꼭 껴앉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때 논개의 손가락에 끼여 남강 깊숙이 가라앉았던 쌍가락지는 지금 촉석루앞 남강을 가로지르는 진주교 다리발마다 굵은 금 쌍가락지로 되살아나 진주인들의 가슴에 영원히 빛나고 있다.
진주시의 캐릭터가 논개다. 진주의 관문에 서있는 대형 간판이나 각종 관광안내책자에는 어김없이 날렵한 한복 매무새의 논개가 그려져 있다.
논개 캐릭터는 전북 장수군도 채택하고 있다. 논개의 출생지로 알려진 장수군에는 논개 생가터와 사당(의암사·義巖祠)이 있고, 장수군은 매년 5월 10월 두차례 '주논개 대축제'를 연다.
충절의 도시 진주는 특히 교방(기생) 문화와 관련이 깊다. 1906년 진주 기생 산홍(山紅)은 을사오적신의 하나인 이지용이 첩이 되어 달라고 하자 "역적의 첩이 될수는 없다"며 자결했다고 전한다.
또 3·1 독립만세 운동 당시 진주교방 소속 기생들이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남강변을 돌며 만세를 불렀고, 그 가운데 6명이 왜경에 붙잡혔다고 한다.
진주문화원 이병찬 원장은 "일제시대 이후 관기제도가 없어지면서 전국의 모든 교방이 문을 닫았지만 진주교방 관기들은 의기사에 모여 전통음악과 춤 노래 등을 지켜나갔고, 독립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을 유지했다"며 "일제에 의해 권번이나 기생으로 전락한 진주교방문화를 되살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충절을 논하면 남명 학맥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 유학의 거두인 조식 남명은 지행합일을 주창했다. 배운 것은 행할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명의 문하생들은 일제히 붓 대신 창칼을 들고 영남일대의 의병장으로 나갔다. 홍의장군으로 왜군들을 떨게 했던 의령의 망우당 곽재우를 비롯, 합천의 내암 정인홍, 고령의 송암 김면 등이 조식의 문하생 출신 의병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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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을 중심으로 한 1960년대 중반과 2004년의 진주 모습. 진주성복원사업(1969~2002) 실시전인 1960년대 중반 진주성에는 민가가 751채나 있었으며 남강엔 천수교(1995년 건립)가 없고 지금은 대규모 주택가로 변신한 신안동 일대(사진 윗부분)도 허허벌판이었다. |
/ 글 = 김찬석기자 chans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