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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실과학동산에 설치한 측우대 복원품. |
농업을 주업으로 하던 조선 시대 백성은 계절에 따라 농사에 필요한 물을 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농사에 필요한 비를 기다리는 농부들은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고, 하늘의 뜻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나 관리들도 농사철에 강우량에 관심을 두고 가물 때면 기우제를 올리고, 홍수가 나면 기청제(祈請祭)를 거행했다. 이같이 옛사람들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기상 이변이 발생하고 하천이 범람하는 재해들에 대해서 자연의 이치로 여기며 오랫동안 살아왔다.
강우량은 농산물의 수확량을 가늠하는 척도로 세금을 책정하는 지표가 됐다. 당시 관원들은 각 지역의 우량을 측정하는 방법으로 땅속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측정했는데, 자를 흙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어 들어가는 깊이를 재어 강우량을 측정했다. 그러나 세종 시대의 학자들은 이와 같은 자연현상에 대해 불완전한 방법에서 벗어나 철(鐵)로 주조한 원통형의 우량계를 만들어 학문적이고 과학적이고 정량적인 계측기를 창제했다. 세종 23년(1441)에 세계 최초로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測雨器)를 발명했다.
그러나 측우기의 사용 기록은 성종 이후로 점차 횟수가 줄어버려 선조 19년의 기록을 끝으로 중단됐다. 그러나 영조 46년(1770)에 영조는 70세의 고령에 세종의 측우기를 연구해 새롭게 복원하게 되었다. 이때 복원한 측우기를 다시 전국적으로 사용하게 돼서 당시 강우량의 통계자료를 가지고 기상자료를 비교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강우량을 측정한 방법으로 단위 시간당의 강우량에 따라서 그 명칭을 8종류로 세분하여 미우(微雨) 세우(細雨) 소우(小雨) 려우(麗雨) 취우(驟雨) 대우(大雨) 폭우(暴雨)의 이름을 사용했다. 아쉽게도 세종 때 측정한 강우량 기록은 없어졌지만, 영조의 측우기 복원 덕분에 그 후부터 서울의 230년간 강수량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잘 보존돼 있다.
세종 때와 영조 때는 청동으로 주조한 측우기들이 제작됐지만, 현재 아쉽게도 유물은 찾아볼 수 없고 1837년 공주 감영에 설치했던 금영측우기(보물 561호)는 일본 기상청에 보관돼 있다가 1971년 반환돼 유일하게 기상청에 보존돼 있다. 그 외에 측우기를 받치는 측우대 유물이 4개 남아 있다. 현재 장영실 과학동산에는 보물 제561호로 지정된 측우기와 보물 842호 측우대(대구 감영 측우대), 보물 843호 측우대(관상감 측우대), 보물 844호 측우대(창덕궁 측우대)를 각각 원형으로 삼아 제작한 것이 설치돼 있다.
측우기 구조는 세 부분으로 구성돼 서로 연결해 조립하게 돼 있으며, 위의 두 부분은 밑바닥이 없으며 맨 밑부분은 바닥을 두어 물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우량을 측정할 때는 주척(周尺, 1자=20.7㎝)을 사용했다. 세종 때는 측우기를 사용해 세계 최초로 정량적인 우량을 측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물의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水標)를 세계 최초로 창제했고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할 수 있는 풍기대(風旗臺)를 사용해 과학적인 기상관측 활동을 수행했다.
이용삼·충남대 천문우주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