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상담하다 보면 심심찮게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내가 이럴 줄 몰랐다'이다. '내가 이렇게 화가 많은 사람인지 몰랐어요. 아이들에게 별 것 아닌 일로 소리를 지르는 내 모습에 저도 깜짝 놀라요' 혹은 '저는 참 밝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무력하고 소심해질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모두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를 찾는 환자들은 대부분 비교적 평탄한 삶을 영위하다 어려움을 겪고난 후 몸과 마음의 변화에 버거워한다. 대개 인생의 고난이나 어려움은 예상치 못하게 우리를 세차게 뒤흔들고, 살아 움직이는 우리는 당연히 그에 대한 반응을 하게 된다. 감당 안 되는 충격에 멍해지기도 하고 부당함에 거세게 분노하기도 하며 암담함에 끝없는 우울의 늪으로 침잠하기도 한다. 때론 마음에서 이 어려움을 소화하지 못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의학에서도 삶의 갑작스런 부정적 변화로 인해 몸과 마음의 증상을 표현하는 병명으로 '탈영'과 '실정'이 있다.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의 굴곡에 취약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 보다.

갑작스런 인생의 어려움을 겪으면 자기 자신도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낯선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게 된다. 이전에 내게 없었던 감정이 아니라 굳이 표면으로 드러날 필요가 없었던 감정이다. 내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던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지와 별개로 지금 내게 필요한 에너지인 것이다. 예를 들어 분노는 나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호소하는 수단이다. 내가 이것보다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강하게 어필하는 수단이며 그것을 알아달라는 애원이다. 그런 모습을 낯설게 느끼고 있다면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니 그것 나름대로 좋은 신호이다.

내가 낯설게 느끼고 불편해 하는 나의 감정을 억누르거나 고개 돌리지 않고 가만히 지켜봐주면 감정은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물러난다. 나는 상담할 때 (환자가 그럴 준비가 되었다면) 환자가 불편해 하는 감정을 환자와 함께 바라보는 훈련을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환자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와 통찰을 얻는 모습을 보면 진정으로 보람되고 감격스럽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의 다섯 가지 감정이 모두 바란 것은 주인공의 행복이었다. 주인공의 행복을 위해 각 감정들은 동분서주한다. 혹시 지금 나를 지배하는 감정이 불편하고 어색하더라도 내쫓거나 없애려 하지 말고 감정에 귀 기울이고 지켜봐 주길 바란다. 지금의 감정은 자신의 일을 다 하고 나면 여러분들의 행복을 위해 다른 감정에게 그 자릴 기꺼이 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부산대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