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부산본부 화폐정사실. 돈이 최후를 맞는 곳이다. 김성효 기자 shkim@kookje.co.kr

돈이 싫은 사람이 있을까. 달관한 도인이나 무인도에 혼자 살지 않는 한 그럴 경우는 없을 것이다. 무자년 새해에도 어김없이 돈이 삶의 화두다.

'돌고 돌아' 돈이라 하던가. 인간만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돈. 따지고 보면 우리네 인생을 빼닮았다. 같은 종이에서 태어나도 '출생'에 따라 귀천이 갈린다. 역할과 기능도 제각각이다. 행복을 가져다 주는 고귀한 삶을 살거나 사람을 해치는 비수가 되기도 한다. 더러 가짜 인생을 살며 사회를 좀먹기도 한다. 천수를 누리는가 하면 불의의 사고로 제 명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 흙으로 돌아간다면 지폐 역시 종이로 다시 돌아간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쳐 세상을 유랑하듯 떠도는 돈. 세상 풍파를 모두 거친 돈이 삶을 마치는 곳은 다름 아닌 한국은행이다. 한국은행 부산본부에서 '돈의 최후'를 목도했다.

하루 156억 원이 허공 속으로

한국은행 부산본부 4층 화폐관리팀 내 정사실. 은행이나 금융권에서 거둬들인 지폐를 다시 쓸 돈과 못 쓸 돈으로 감별하는 곳이다. 돈의 입장에서 보면 '생사'가 갈리는 곳.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역시 산더미같은 만원권 돈다발들이다. 1000만 원씩 묶여 테이블마다 어림잡아 20억~30억 원씩 쌓여 있다.

현재 한국은행 정사실의 주업무는 신권 발행으로 인한 구권의 폐기작업이다. 회수된 구권은 전량 폐기된다. 지난해 폐기된 지폐는 13조7023억 원(부산본부 2조310억 원). 부지런히 구권을 없앤 결과 시중의 신권 유통 물량은 75.3%(2007년 12월말 현재)에 달한다. 만원짜리 구권의 경우 1983년 이전에 발행된 것까지 모두 3종류가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다. 이날 하루 부산본부에서만 156억 원이 사라졌다.

화폐관리팀은 은행 내에서도 보안이 가장 엄격하다. 직원들조차 출입이 제한되며 정사실 안에는 CCTV만 20대 가까이 설치돼 있다. 일반인은 평생 구경하기도 힘든 돈을 매일 만지는 사람들. 길거리에 떨어진 만 원만 봐도 두근대는게 인지상정. 혹시 '딴 마음'이 들지는 않을까. "그러면 큰일 나죠. 이건 돈이 아니고 그냥 물건입니다." 화폐관리팀 양재득 과장의 '당연한' 답변이다.

분쇄돼 벽돌 크기로 압축돼 버려지는 지폐.

놀라운 정사기의 힘

지폐 정사작업은 의외로 간단하다. 과거 수백 명이 붙어 수작업하던 것을 근래에는 고가의 자동정사기가 도맡았다. 1000만 원 묶음을 풀어 정사기에 투입하면 첨단 센서와 벨트를 거쳐 순식간에 위폐 감별, 장수 계산 그리고 '쓸 돈과 버릴 돈'을 구분해 낸다. 구권이나 소손권의 경우 즉시 잘게 파쇄되어 내부 파이프를 타고 압축기로 보내진다. 이런 전 과정은 길어야 40초다. 대당 10억 원에 수입한 독일제 자동정사기는 부산본부에 4대가 있다. 그렇다고 사람 손이 필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정사기마다 2인1조로 화폐정사원들이 배치돼 기계가 이해하지 못해 뱉어내는 지폐를 감별한다.

정사기는 구권은 모두 폐기시키지만 더러 '살아남는' 경우가 있다. 돈이 아닐 때다. 시중은행에서 업무 착오로 '엉뚱한 것' 이를테면 상품권이나 수표를 끼워 한국은행으로 보내 오기도 한다. 물론 정산 후 해당 은행으로 모두 돌려보낸다.

위조지폐도 예외는 아니다. 공교롭게 이날 부산본부에서 무자년 첫 만원권 위폐가 발견됐다. 경북의 어느 농협에서 회수된 것이다. 여느 위폐와 달리 컴퓨터 스캔을 통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다만 도안 초상의 음영이 나타나지 않고 일련번호의 서체가 진폐와는 차이가 난다. 그래도 담당 화폐정사원은 "근래에 본 것 중에 진폐와 가장 흡사하다"며 감탄할 정도다. 한쪽 귀퉁이가 꽤 닳은 것을 봐 여러 사람을 거친 듯 했다. 지난 해 국내에서 발견된 위폐의 건수는 1만9614건(부산 962건), 금액으로 22억6000만 원 가량이 세상을 활개쳤다.

한 줌 종이로…

정사기에서 '최후'를 맞은 돈은 모두 압축기를 거쳐 벽돌(압축 모양은 지역본부와 설비에 따라 제각각이다) 크기로 성형돼 1층으로 배출된다. 이때부터 더이상 돈이 돈이 아니다. 만원권 한 장의 무게가 1.17g임을 감안하면 압축물 하나에 850만 원어치다. 지폐는 종이가 아닌 100% 면 섬유가 원료여서 폐지폐는 재가공을 통해 건축용 바닥재 등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만큼 채산성이 맞지 않은 게 흠이다. 부산본부에서도 몇 년 전 모 업체가 압축폐기물을 수거해 자동차 쿠션 자재로 재활용했지만 경영난을 못 이겨 문을 닫고 말았다. 지금은 한 포대당 10만 원의 처리 비용을 지불하고 전량 폐기하고 있다.

"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귀중한 자원이 재활용되지 못하고 쓰레기로 버려지는 게 마음 아픈 어느 직원의 추모사다.

'돈의 요람이자 무덤' 한국은행

은행의 은행, 한국은행. 일반인으로는 생전 가볼 일 없는 곳 중에 한 곳이다. 경제·금융이 관심사로 떠오른 요즘에야 나아졌지만 몇 년전만 해도 한국은행 직원들이 늘상 받는 질문이 이런 거라고. "좋은 예금상품 있으면 가입하고 싶은데…."

국가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고객은 당연히 일반은행. 한국은행이 시민을 상대하는 경우는 딱 한가지, 화폐 교환 업무다. 주로 신권 교환을 위해 시민들이 꾸준히 발걸음을 한다. 훼손이 심해 시중에서 유통이 어려운 지폐도 한국은행에서 감별 후 교환 가능하다. 또한 일반 은행들이 업무부하를 이유로 곧잘 거부하는 동전 교환도 한국은행에서는 흔쾌히 도와준다.

참고로, 대한민국에서 현금을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이 한국은행이다. 하지만 한국은행 금고에 보관된 현금 태반은 미발행 화폐로 시중 통화량에는 합산되지 않는다. 돈이 돈으로서의 생명을 얻으려면 반드시 한국은행 창구를 나올때만 가능하다. 돈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행은 '돈의 요람이자 무덤'이다.


# 지난해 희귀지폐 439장(65만9460원) '역사 속으로'

- 한국은행 액면가 환전 폐기 처리

신권이 발권되면 한국은행은 구권을 전량 회수해 폐기시키는 게 원칙이다. 비록 시중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희귀 돈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한국은행에서 폐기한 500원권 이하 '옛날 지폐'는 모두 439장, 65만9460원이다. 500원권 64만500원, 100원권 1만7100원, 50원권 600원, 10원권 1250원, 5원권 10원을 없앴다. 5원권의 경우 1969년 5월 이후 발행이 안되고 있다.

보존 상태와 종류에 따라 차이가 크지만 '유통되지 않았던' 깨끗한 옛날 지폐의 경우 최고 수백만 원에 거래가 형성된다.'유통되지 않은 옛날 지폐'란 당시 은행에서 발권된 새 지폐 그대로 보존된 것을 가리킨다. 한번이라도 다른 사람을 거치면 가치는 급락한다. 부산화폐사 황성식 사장은 "하지만 손때가 묻었다 하더라도 옛날 지폐는 액면가보다는 훨씬 높은 가격에 팔린다"고 말한다.

한국은행으로 옛날 화폐가 들어오는 경로는 헌 돈을 새 돈으로 바꿔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재득 과장(한국은행 부산본부 발권팀)은 "옛 지폐를 신권으로 교환하려는 사람들이 가끔 찾아온다"며 "은행에서는 액면가로만 환전되기 때문에 가급적 소장을 권유한다"고 한다. 1962년 화폐개혁 이전에 통용되던 '원' 이하의 '환' 단위 화폐는 한국은행에서 교환이 불가능하다.


◆ 지폐 폐기액 추이

폐기액(원) 폐기수(장)

2002년 5조9601억 9억4400만
2003년 5조9660억 9억4500만
2004년 6조5697억 10억6200만
2005년 5조7623억 10억200만
2006년 5조9764억 10억2600만
2007년 13조7023억 18억6306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