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의 그라운드에 공 하나를 가지고 펼쳐지는 축구라는 경기는 오늘도 수많은 기록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록들이 쌓이면서 역사가 되고 그 역사는 팬들의 마음 속에 녹아내리면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낸다.

지난 8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라이언 긱스는 더비 카운티와의 프리미어리그 16차전에서 리그 통산 100골을 뽑아냈다. 바로 다음날 9일에는 프리미어리그 강등권에서 허덕이던 미들즈브러가 22경기 무패행진을 벌이던 무적 아스날을 상대로 2-1의 귀중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라이언 긱스의 리그통산 100골이라는 위업은 17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달성된 대기록이다. 물론 잉글랜드에서 앨런 시어러(260골), 앤디 콜(188골), 티에리 앙리(174골) 등 많은 선수가 기록면에서 긱스보다 앞서 있다. 하지만 긱스의 기록은 맨유라는 팀에서만 만들어낸 꾸준함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긱스가 17년 동안 만들어낸 100골을 지켜봤던 수많은 팬들은 '긱스'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긱스'의 축구를 하나의 문화로 인식해 가고 있다.

2005년 박지성이 네덜란드의 PSV 아인트호벤에서 잉글랜드의 맨유로 이적해 왔을 때 당장이라도 긱스를 벤치로 내몰고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다. 물론 박지성이 승승장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고, 언젠가 산소탱크 박지성의 무한한 에너지가 긱스를 완전히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7년 세월 동안 긱스가 맨유에서 이룬 역사와 문화를 단번에 갈아 치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박지성에게도 그만한 시간과 노력, 꾸준함이 필요하다. 그래야 주변에서 겉도는 선수가 아니라 팬들의 가슴에 새겨지고 역사와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다.

한편 이동국이 뛰는 미들즈브러는 올 시즌 저조한 성적으로 홈 팬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하지만 무패행진을 달리던 아스날을 이기던 날 미들즈브러 팬들은 비가 오는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경기장 안팎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팀의 승리를 자축했다.

이날 경기장을 밟은 14명의 선수들은 팀을 위해 싸운 전사로 팬들의 마음과 뇌리에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이 경기 이전에도 미들즈브러는 프리미어리그의 강팀들인 맨유나 첼시 등을 상대로 종종 승리를 거두며 팬들을 흥분시켜왔다. 한 경기 한 경기의 기록들이 미들즈브러 팬들에게는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과 역사의 순간에 미들즈브러의 이동국은 후보명단에만 이름을 올리고 끝내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선수와 팬들이 하나가 되는 특별한 순간에 동참하지 못한 것이다 . 이런 순간들이 축적돼 만들어지는 역사와 문화에 이동국이 팀 동료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100년이 넘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 우리 한국선수들이 남긴 흔적은 고작 2년 안팎이다. 우리 선수들이 그냥 흔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역사와 문화의 한 부분으로 남기 위해서는 긱스가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룩한 대기록처럼 한결같은 꾸준함이 전제돼야 가능하다. 우리 선수들이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들은 아직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