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은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이 됐다. 바로 유럽의 월드컵이라고 하는 2008유럽선수권대회(유로 2008) 본선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1994년 미국월드컵 본선에 올라가지 못한 이후 13년 만의 일이기도 하다. 잉글랜드는 국가 전체적으로 충격에 빠졌고 그동안 대표팀을 지휘해 왔던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은 크로아티아와의 마지막 예선 경기 후 전격 경질됐다.

잉글랜드의 탈락과 연이은 후폭풍에는 러시아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히딩크 감독의 심리전과 언론플레이가 그 빛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7일 러시아는 유로 2008 예선 두 경기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이스라엘에 1-2로 패하게 된다. 이 경기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승점 24점으로 승점 23점인 잉글랜드를 누르고 본선진출을 위한 유리한 고지를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승점을 쌓는 데 실패하면서 분위기는 잉글랜드쪽으로 흘러갔다. 잉글랜드는 크로아티아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러시아의 최종 경기에 상관없이 자력으로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히딩크가 한몫 거들었다. 잉글랜드 주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잉글랜드가 본선에 충분히 진출할 수 있다." "애석하기는 하지만 잉글랜드는 본선진출 자격이 있다"라고 말했다. 물론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히딩크의 발언은 표면적으로 모든 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상당히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의 탈락을 대비해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이기도 하지만 트로이의 목마처럼 상대를 안심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전략이었다. 언론을 통한 심리전에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마지막 경기에서 러시아는 약체인 안도라와 경기를 갖고 잉글랜드는 조 1위로 본선진출을 확정지은 크로아티아와의 경기를 남겨두고 있었다. 약체 안도라를 상대로 러시아의 승리는 거의 확실시되었지만 잉글랜드는 크로아티아와 비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잉글랜드는 지난해 10월 11일 크로아티아와의 유로 2008 예선 홈 경기에서도 0-2로 무릎을 꿇었다. 크로아티아가 본선진출을 확정지었다 해서 만만하게 볼 팀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히딩크의 발언과 함께 분위기는 러시아보다 잉글랜드의 본선진출쪽으로 흘러갔고 최소한 비긴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지 잉글랜드의 맥클라렌 감독은 크로아티아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전통적인 4-4-2 전술 대신 4-5-1 전술을 들고 나왔고 경험이 많지 않은 스콧 카슨 골키퍼를 기용했다. 존 테리나 웨인 루니 등 주전선수들의 부상 탓도 있었지만 감독은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즉시 기용 가능한 데이비드 베컴이 전반 내내 벤치에서 경기를 봐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본선진출 낙관론에 빠져 있던 잉글랜드의 감독과 선수들은 결국 2-3으로 크로아티아에 패배해 유로 2008 본선 진출이 좌절됐고 안도라를 1-0으로 이긴 러시아가 본선에 진출했다. 히딩크의 마법이 언론 플레이를 통해 빛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