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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흥망성쇠, 척박한 생존환경…음모·술수가 판쳤다

한중수교 30주년…중국을 다시 보다 <4> 여전히 강호의 정서 충만한 中

  • 조광수 전 영산대 중국학과 교수
  •  |   입력 : 2022-10-04 19:07:26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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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는 보은·복수의 정서 상징
- 전 세계 20% 인구 모여살지만
- 경작할 땅은 좁아 부대끼는 삶
- 왕조는 짧은 주기로 분열·통합
- 난세가 꾀와 속임수 발달 불러

- 삼국지 속 의협심 발휘한 관우
- 죽어서도 신으로 추앙받게 돼

- 시진핑 정상 오르자 권력 본색
- 역사 속 권모술수 고수 보는듯

강호는 은원(恩怨)이 모이는 곳이다. 은원은 갚아야 한다. 은인에게 보답해야 하고 원수에겐 복수해야 한다. 갚음은 사람살이의 기본이다. 다만 그 갚음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강호의 정서다. 온갖 암수와 암기(暗器)가 다 동원된다. 부채를 펴면 독침이 쏟아져 나오고 소매에선 표창이, 품에선 단도가 발사된다. 사태가 여의치 않으면 연막탄을 터뜨리고 사라진다. 기막힌 변장술까지 묘수 백출이다. 무협지의 정석이다. 무협은 격렬한 사회변동 상황에서 개인이 직면하는 위기와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 폭력으로 저항하는 비극을 그린 것이다. 치열하고 비장할 수밖에 없다.
중국 후베이성 징저우시에 있는 높이 57m의 관우 청동 조각상. 세계 최대 규모의 청동 조각상으로 알려졌으나 너무 거대해서 주변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지난해부터 해체작업이 진행 중이며 다른 곳으로 이전될 예정이다. 출처:중국 웨이보
■강호·무협은 中에만 존재하는 공간

중국은 참으로 기묘한 나라다. 강호와 무협의 세계는 오직 중국에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척박한 생존환경이고 또 하나는 국가가 생명과 재산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대물박(地大物博)하지만 1인당 경작지는 세계 평균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많다. 중국 땅엔 2000년 전에도 세계 인구 20%가 살았다. 1662년 세계 인구가 5억 명일 때도 1억 명이었으며 1949년 신중국 건국 때도 세계 인구의 5분의 1인 5억4000만 명이었다. 지금 인구도 거의 20%에 해당한다. 비슷한 크기의 미국 인구가 3억3000만 명인 것과 비교하면 4배나 많은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야 어디든 대동소이하지만 그래도 넉넉한 것과 부대끼는 것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다. 부대낄수록 단련되고 닳는다.

게다가 중국 역사는 분열과 통합이 짧게 반복되어 온 세월이다. 2000년 절대왕정 시대의 왕조 평균 연수가 채 100년이 안 된다. 나라의 흥망 과정은 뜨르르한 영웅호걸에겐 건곤일척의 승부이겠지만 일반 백성 입장에선 생불여사의 시간과 공간일 뿐이다. 짧은 주기로 분열과 통합이 거듭되고 인구는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대목에서 국가는 제 역할을 못 했다. 혼돈유구(混沌悠久)한 난세, 살벌하고 각박한 환경에서 중국인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두 가지다. 끼리끼리 뭉치는 방법과 온갖 꾀를 다 짜내는 방법이다. 끼리끼리 뭉치다 보니 관시(關係) 문화가 생겼고 갖은 꾀를 동원하다 보니 음모와 술수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음모 술수는 후흑학과 삼국지의 전형

루쉰(왼쪽), 후흑학
음모와 술수는 ‘후흑학’과 ‘삼국지’가 전형이다. 중국의 3대 기인(奇人) 리종우(李宗吾)는 “중국 역사 24사를 읽어보니 한마디로 후흑일 뿐이다”고 통찰했다. 후(厚)는 얼굴이 두껍다 즉 뻔뻔함이고, 흑(黑)은 마음이 검다 즉 음흉함이다. 후흑의 반대는 박백(薄白)이다.

리종우는 후흑학이란 학설로 삼국지의 인물을 품평했다. 조조는 심흑면박(心黑面薄)이다. 음흉하지만 뻔뻔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검은 복심에 야심은 만만하지만 체면도 차리고 역사의 평가도 두려워해서 결국 당대에 황제 자리를 포기했다. 유비는 면후심백(面厚心白)이다. 뻔뻔하지만 음흉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유비는 출사 이후 동가식서가숙하다 마흔여덟에야 자신의 기업(基業)을 갖게 된다. 그 과정은 비루하다. 부끄러움 없이 변신과 눈물로 버텼다. 다만 위선적이긴 했지만 음흉하지는 않아 민심을 얻었다. 손권은 뻔뻔함은 유비만 못하고 음흉함은 조조만 못했지만 그래도 전략적인 처세로 셋 중 가장 장수하며 지역 패자(覇者)의 권세를 누렸다.

이들 후흑의 대가가 서로 얽히고 설키며 은원을 쌓고 전쟁하는 스토리가 바로 소설 ‘삼국지’다. 중국인은 체질적으로 삼국지 유형이고 후흑의 대가들이다. ‘베이징역 앞의 지게꾼’이라도 만만한 사람은 없다. 멍청해 보이는 아큐(阿Q)부터 무표정한 보통사람 그리고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자까지 나름 ‘삼국지다움’을 체득하고 있다.

■의협심 덕분에 죽어서 신이 된 관우

여기서 삼국지 관련 퀴즈 하나. 난세에 인물 난다고 연의 삼국지에는 기막힌 인물이 숱하게 등장한다. 머리 좋고 담력 있는 영웅, 단기필마로 만 명을 대적하는 장수, 광기와 천재의 문인과 경국지색의 미인 그리고 천하를 손바닥 안에 두고 조종하는 탁발한 책사 등 주인공급 인물이 적어도 300명은 된다. 그들 중에 유일하게 죽어서 신이 된 사람이 하나 있다. 누구일까.

관우다. 관우는 신장(神將) 또는 무신(武神)으로 추앙되고 심지어는 관제(關帝)로까지 모셔진다. 게다가 비극적인 최후가 영웅의 색채를 더해준다. 영웅 신화는 항우든 아킬레우스든 비장한 최후로 마무리되는 게 보통이다. 관우는 무덤이 두 곳이다. 머리와 몸이 따로 묻혔기 때문이다. 한 곳은 관릉이고, 다른 한 곳은 관림이다. 릉은 임금에게 붙이는 존칭이니 일단 황제 대우는 받고 있는 것이다. 더하여 관림(關林)은 황제를 능가하는 대우다. 정사에 기록된 황제 406명 중 묘에 수풀 림 자를 쓴 경우는 단 하나도 없다. 림 자의 대우를 받은 건 관우 이전 공자가 유일하다. 공자 묘를 공림(孔林)이라 하고 역대 황제들이 참배했다. 문(文)에선 공자, 무(武)에선 관우만이 그런 영예를 얻은 것이다.

관우를 굳이 언급한 이유는 그가 가장 ‘삼국지다움’에서 벗어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삼국지답다’란 음모와 술수에 능하다는 뜻이다. 삼국지 마니아였던 루쉰(魯迅)은 “중국 사회엔 확실히 삼국기와 수호기가 있다”고 했다. 삼국기(三國氣)란 불만이 가득한 분위기이고, 급격한 변동을 갈망하는 기운이다. 수호기(水湖氣)는 그보다 더 살벌한 반항과 반역의 기세다. 정상적인 도리인 상도(常道)보다 임기응변과 권모술수인 권도(權道)가 유행하던 시대, 잦은 전쟁으로 병불염사(兵不厭詐)가 일상이던 시대에 관우는 전혀 삼국지답지 않았다. 늘 정면 돌파, 정치와 전략에 청맹과니였다. 누굴 속일 줄도 몰랐고 그저 당당하고 오만했다. 관우를 키운 것도 꼿꼿한 프라이드였고 망친 것도 바로 그 지나친 프라이드였다. 성군(聖君)과 청관(淸官)의 꿈이 무너진 현실에서 누군가 나타나 의협심을 발휘해 불의에 맞서준다면 얼마나 통쾌하겠는가. 그 협객의 꿈이 오롯이 관우에게 집중된 것이다.

■시진핑 총서기의 3연임 도전

시진핑 공산당 총서기의 권력 집중화 과정을 보면 그야말로 후흑학의 고수다. 후흑의 최고 경지는 전혀 표가 나지 않는 것이다. ‘후이무형(厚而無形) 흑이무색(黑而無色)’의 단계로, 명백히 후흑인데 형체가 없고 색깔이 없으니 보기에는 불후불흑이다. 겉과 속이 온전히 같으니 절정 고수인 것이다.

천하대란 끝에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덩샤오핑과 당은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지도 그룹에서 배제해왔다. 능력이 있지만 카리스마 기질은 덜한 인물을 찾았다. 장쩌민과 후진타오 모두 그런 맥락의 인선이었다. 시진핑도 그런 무난한 인물인 줄 알았다. 처음 정치국 상무위원에 발탁되었을 때 좀 더 액티브하고 솔직한 리커창보다 서열이 하나 높았던 것도 그런 연유다.

시진핑은 오랫동안 본색을 숨기고 카리스마가 드러나는 걸 누르며 지낸 강인한 영혼이다. 문화대혁명 와중인 10대에 부총리를 지낸 부친 시중쉰을 고발·비판했고, 거리에서 얻어먹으며 시골 토굴에서 버텼다. 궁핍과 핍박에 시달리던 이복누이는 못 견뎌 자결했다. 시진핑은 9전 10기로 당원이 되었고 40년 동안 16번의 관문을 통과하며 힘과 의지를 숨겼다. 그리고 정상에 오른 뒤 불과 2년 만에 권력을 집중시키더니 당장(黨章)과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용의주도하게 권력 공고화 작업을 해왔다. 격대지정(隔代指定)의 관례에 따라 5년 전에 지정했어야 할 계승자도 없다. 그간의 제도화를 한참 퇴행시킨 것이다.

중국 미국 및 세계에 관한 최고 전략가로서 통찰을 지녔던 고(故)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는 시진핑을 “자신의 불운과 고통에 휘둘리지 않는 엄청난 정서적 안정감을 지닌 인물”로 평했다.

이제 시진핑은 정상(頂上) 3연임을 준비하고 있다. 스트롱 맨을 자처하는 독재자는 러시아의 푸틴 하나로 족한데 그보다 더 속 깊고 집요한 인물을 한동안 더 보게 될 전망이다. 현대판 황제로 절대 권력을 누렸던 마오쩌둥의 시즌 2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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