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형 봉분은 가야 고분군과 흡사
흥륭와 지역 거주 형태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았다. 촌락 주위를 해자로 둘러쌌는데 아마 초원지역의 특성상 인근 산림의 맹수로부터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고안해낸 방편일 것이다. 촌락 내부의 집들은 장방형 또는 방형의 반지하 토굴로 십여 채의 집들이 일렬로 늘어선 형태였다. 면적은 일반적으로 수십 제곱미터 규모여서 한 집에 한 가구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촌락 가운데에는 140제곱미터에 달하는 상대적으로 큰 규모의 집이 두 채 있어 지도자나 신앙과 관련된 주재자가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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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륭와촌을 비롯한 내몽고 벌판은 모두 이처럼 황량하고 드넓은 자연환경이다. 아무래도 사람이 농경생활을 하며 정주하기에는 척박한 지역이다. |
눈길이 가는 것은 그들의 매장 풍습이다. 흥륭와촌은 요령성 서부를 흐르는, 고조선과도 인연 깊은 대릉하(大陵河)의 지류인 망우하(牤牛河) 상류 연안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구릉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드넓은 초원을 바탕으로 완만한 능선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드문드문 펼쳐져있는데 강이 흐르는 곳은 땅이 패여 구릉을 형성하는 지형이고 사람들의 촌락은 물이 흐르는 구릉을 끼고 조성되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 주거지 내에 매장하는데 일부 주검은 인근 산 정상 가까이에 매장했다. 지도자나 신앙의 주재자 무덤으로 땅을 지키는 수토(守土)나 승천(昇天)을 기원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오르는 영혼을 배려한 것이다.
중원과 달리 북방민족에게서는 나뭇가지 등 하늘과 연결 짓는 상징물이 종교나 권력의 기물에 다수 투영되는데 요하문명에 뿌리를 둔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 우리 선조들도 다르지 않았다. 문득 경상북도 고령군의 대가야 고분군이 떠오른다. 수천 년 뒤 고도의 정치화가 이루어진 세상에서 성행한 대형봉분과 부장(副葬)을 더한다면 산 정상 가까이 등성이를 따라 무덤을 쓴 독특한 형식은 흥륭와의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석기시대에 이미 나름의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 향유하고, 역사시대에 들어서 중원세력과 끊임없는 마찰을 겪으며 동과 서로 갈라져 대이동을 겪은 북방민족은 분명 우리의 뿌리이다. 반도의 좁은 사관에서 벗어나 드넓은 북방과 멀리 서방으로까지 이어진 그들의 옛 발자취를 더듬어 호연지기를 키워야 할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