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대 재학시절 시위 기획·주도
- 영화 ‘서울의봄’ 관람후 목표 생겨
- 참여자 예우 여전히 부족해 숙제
“부마민주항쟁을 영화로 만드는 게 꿈이에요. 문화의 파급력을 빌어 대중에게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운 진실과 그 정신을 알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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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갑순 부마인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이 부마항쟁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야 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
2일 국제신문과의 인터뷰에 나선 최갑순(68)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은 최근 ‘서울의 봄’을 관람하고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며 기대감에 부풀어 말을 건넸다. 1979년 경남대 국어교육학과 3학년이던 최 이사장은 그해 10월 부마항쟁 때 주도적으로 시위를 기획하고 학생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당시 경찰에 붙잡힌 그는 50여 일간 수감생활을 하며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최 이사장에게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된 배경과 재단 운영 방향 등에 대해 들어봤다.
1956년 경남 고성군 하이면 사곡리에 있는 유학 마을에서 나고 자란 최 이사장은 초등학교 입학 전 동네 할머니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전기수 역할을 자처했다. 당시 권선징악을 주제로 전쟁을 통한 주인공의 영웅적 활약을 다룬 군담(軍談) 소설을 주로 낭독했던 탓에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그는 손위 형제들을 따라 서울로 상경해 명성여고(현 동국대 부속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영포’(영어 포기) 족이었던 그는 예비고사 1점이 모자라 경남대에 입학한다. 당시만 해도 다른 학생들과 대화도 자주 나누지 않던 수줍음 많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1978년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이 터진다. 여성 노동자들이 남성 중심의 어용 노조에 대항해 민주노동조합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당시 같은 업종에서 근무하던 사촌 언니가 당한 일처럼 안타까워 밤잠을 설쳤어요. 겁이 났지만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죠.”
최 이사장은 이듬해인 1979년 5월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동아일보 사설을 읽고 있던 친구 옥정애 씨를 만나게 됐고, 둘은 뜻이 있는 학생들과 함께 집행부를 꾸리게 된다. 이들은 같은 해 10월 22일 학내에서 인파를 모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선 정신을 기념하는 3·15 의거 기념탑으로 모일 계획을 세웠다. YH 무역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시위를 벌여 경찰에 진압당한 사건이 있은 직후였던 터라 마산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합류가 예상됐다.
그런데 10월 16일 부산에서 시위가 먼저 일어났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그는 “계획을 앞당겨 18일 시행하기로 했다. 당일 학교로 몰래 들어가 사람들을 모았다. 오후 5시에 3·15 탑으로 모이자고 외치고 또 외쳤다”고 말했다. 최 이사장은 당시 마산MBC 사옥 앞 시외버스정류장에서도 선전 활동을 이어갔다. 북마산과 진해를 오가기 위해 정차 중인 버스를 붙잡고 시민 호응을 유도했다. 3·15 회관 인근 공터에 모인 인파를 산복도로에서 학생들과 합류시켜 도열하던 중 사달이 났다. 덩치 큰 형사가 최 이사장의 머리채를 낚아채고 연행한 것이다.
격한 시기를 거치며 최 이사장의 갈 길은 분명해졌다. 1986년 지역 첫 민주적 여성운동 단체인 경남여성회를 동료들과 함께 창립해 성폭력방지특별법 제정 등을 이끌었다. 과거사를 규명하는 일도 계속됐다. 최 전 회장은 2018년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창립에 참여했고 2021년 이사장직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증언집 발간 사업 등에 앞장섰다. 그러나 부마항쟁 진상 조사는 여전히 기초적인 수준이고 참여자에 대한 예우도 부족하기만 하다. 최 이사장에게 남은 숙제인 셈이다.
최 이사장은 “거창한 의미를 담아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신의를 지키며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게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