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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인 시설 인권유린 증언] <1>지옥의 삶 들려준 유수권 씨

밥 사준단 말에 속아 5년 감금…누가 믿겠나 싶어 신고 못해

  • 신심범 기자 mets@kookje.co.kr
  •  |   입력 : 2022-11-06 19:54:09
  •  |   본지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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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고아로 1967년 영화숙 입소
- 고구마 캐거나 가축사육 등 노역
- 관리자 시도때도 없이 폭행 자행
- 수용자 죽으면 몰래 야산에 묻어

- 소 알로이시오 신부 ‘소년의 집’
- 유 씨 포함 아이들 300명 품어
- 가족처럼 돌봐줘 지옥서 탈출

- 유 씨 본지보도 후 용기 내 고백
- “피해자들과 밥 한 끼 먹고 싶다”

1960년대 부산의 최대 부랑인 시설 ‘영화숙·재생원’ 수용자 유수권(가명·68) 씨는 50년간 잊으려 애썼던 생지옥의 삶을 6일 국제신문에 털어놨다. 그는 형제복지원에 앞서 1960~70년대 여러 부랑인 시설 수용자들이 폭행과 강제노역에 시달렸다는 국제신문 보도(지난 1일 자 1·6면 보도)를 보고 기자에게 연락했다. “영화숙·재생원 피해자인 손석주(59) 씨 사연을 보고 너무나 놀라 신문사로 찾아가려 했다. 내가 영화숙에서 겪은 고통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 씨가 용기 내 고백했단 사실에 눈물이 왈칵 나기도 했다”며 한숨 쉬었다. 자신보다 9살 어린 손 씨가 감당했을 고된 삶이 충분히 짐작됐기 때문이다.
1960년대 부산의 부랑인 수용시설인 영화숙에 강제 수용됐던 유수권(가명) 씨가 지난 4일 부산 사하구 장림동 옛 영화숙·재생원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여주연 기자 yeon@kookje.co.kr
유 씨는 “형제복지원 이전에 영화숙·재생원이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다. 가난한 어린아이들이 그곳에서 어떤 일을 당해야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며 흐느꼈다. 또 “피해자들이 서로 만나 위로하고 밥이라도 한 끼 먹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예전 자신이 겪은 5년간의 악몽을 들려줬다.

■끼니 때우기 급했던 넝마주이

유 씨는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 1954년 부산 사하구(당시 서구) 하단동에서 태어났단 것과 어릴 때 부두에서 엄마 손을 놓쳤다는 것이 기억의 전부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폐허 위에서 생의 길을 도모하던 무렵이다. 아무 땅에나 막대기를 꽂아 천막을 세우면 내 집이 되는 시대였다. 그의 부모도 부산 각지를 떠돌며 머리 뉠 곳을 찾아 헤맸다. 그가 유치원생 나이밖에 되지 않았을 때다.

끼니는 유 씨의 최대 과제였다. 밥을 먹기 위해 낯선 아줌마를 따라 경북 고령에 가 머슴살이를 했다. 고된 일을 버티다 못해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선 넝마주이가 됐다. ‘왕초’ 형이 시키는 대로 집게를 들고 천이나 시멘트 종이(크라프트지)를 주웠다. 활동 구역이던 부전역에선 매일 넝마주이 패거리들의 영역 싸움이 벌어졌다. 집게는 상대를 해치는 무기가 됐다. 집게 날을 갈아두지 않으면 형들의 주먹세례를 받아내야 했다.

■‘밥 사준다’기에 따라나선 지옥 길

거친 생활이 주린 배를 채워주진 못했다. 그런 그에게 웬 아저씨가 “밥을 사 주겠다”며 다가왔다. 그가 13살쯤이던 때다. 아저씨는 자신과 일하면 굶는 걱정은 없다고 꼬드겼다.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1967년 ‘영화숙’에 입소했다. 첫날부터 유 씨는 엄격한 군대식 체계 속에서 옥수수를 캐거나 가축을 사육하는 노역에 시달렸다.

유 씨에 따르면 영화숙은 6개의 단층 기와 건물로 이뤄졌다. 건물마다 4개의 방이 딸려 있었는데, 이 방은 ‘소대’로 불렸다. 수용자, 즉 소대원의 일과는 오전 6시에 시작해 밤 9시에 끝났다. 기상 직후엔 단체 세면장으로 가 급하게 몸을 씻었다. “추운 겨울에도 온수가 나오지 않아 손이 부르텄어요. 오줌으로 언 손을 녹이기도 했으니까. 소대장들이 ‘그게 다 약 바르는 거다’며 시켰습니다.”

한 소대 면적은 5~10평이었다. 여기에 어린아이부터 60대 노인까지 50명 가까이 밀집해 생활했다. 취침 시간엔 모로 누워 칼잠을 잤다. 몸을 뒤척이다 잠자는 소대장을 건드리면 무자비한 폭행이 뒤따랐다. 소대장 근처에 누운 수용자들은 절대 그와 닿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서로를 밀어냈다. 소대장은 수용자 중에서 ‘성격 더럽고 남 괴롭히기 좋아하는 놈’을 뽑은 것이라고 유 씨는 기억했다. 손 씨의 기억과 일치한다.

하루 대부분은 밭에서 옥수수나 고구마를 캤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죽도록 맞았다. 몸이 아파 일을 못 해도 매질을 당했다. 누구를 위해 밭일을 하는 것인지 유 씨는 알지 못했다. 그나마 일을 하면 몰래 수확물을 먹어도 돼 좋았다. “하루 두 끼 제공되는 강냉이죽이나 보리밥으론 배고픔을 이기지 못했어요. 밤에 창고에서 고구마를 훔쳐 먹다 들켜 심하게 맞아도 봤어요.” 미군이나 민간단체가 보내온 구호 물품이 수용자에게 닿는 일은 드물었다. 부랑인 시설을 품고 있는 동네 민심을 달랠 목적으로 주민에게 일부를 나눠줄지언정 수용자에겐 국물도 없었다.

관리자들의 폭력은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됐다. 야간 점호 때 말을 더듬었단 이유로 똥·오줌을 퍼붓거나 단체 기합을 줬다. 그러다 수용자가 죽으면 남몰래 버렸다. 가마니에 덮어 야산에 묻거나 ‘똥통’으로 불린 갈대밭 습지에 시신을 가라앉혔다. 관리 부실로 질책당할 것을 걱정한 소대장들이 이런 방식으로 시신을 숨겼다고 한다. 그는 “가마니 한 장도 아깝다고 반 장으로 시신을 덮었다. ‘똥통’에 시신을 가라앉힐 때의 기억은 도무지 잊히질 않는다”고 괴로워했다.

유 씨는 그가 생활한 영화숙이 바로 옆 ‘재생원’에 비하면 그나마 괜찮았다고 했다. “재생원의 삶은 정말 비참했지. 재생원 철창문은 늘 열쇠로 잠겨져 있어 외출이 불가능했어. 화장실도 방 내부에 있어 악취가 끔찍했지. 영화숙은 화장실이 별도 공간에 마련돼 있었어.”

여성 수용자는 관리자들의 성희롱에 시달렸다고 유 씨는 기억했다. 기록이 확인되는 1962년 재생원 수용자 832명 중 298명이 여성이었다. 재생원은 명목상 성인 부랑인 수용 시설인데도 17세 미만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동 시설인 영화숙에도 많은 성인 수용자가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국 같았던 소년의집

탈출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담장 정도는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러나 후환이 두려웠다. 탈출했다가 도로 잡혀 온 수용자에겐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탈출해도 아무런 연고가 없는 자신을 받아줄 곳도 없었다. ‘나가봐야 다시 넝마주이나 껌팔이밖에 하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수용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는 소대장의 일을 돕는 ‘반장’이 되기도 했다.

그의 지옥 같은 삶은 1972년 ‘소년의 집’으로 전원돼 비로소 끝났다. 소 알로이시오 신부를 주축으로 한 마리아수녀회가 서구 암남동에서 운영한 아동 시설이다. “당시 소년의집에서 영화숙 아이들을 250~300명 데려갔다. 나도 그 속에 끼어 옮겨졌다”고 그는 기억했다. 다만 소년의집 기록에는 1970년 영화숙 수용자 7~12세 아동 300명을 전원했다고 적혀있다. 1971년에는 영화숙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대규모 분산 수용이 이뤄졌다. 소년의집에서 1972년 추가로 수용자를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유 씨는 소년의집에서의 생활이 천국 같았다고 말했다. 식사는 일반 가정식이 제공됐다. ‘엄마’ ‘이모’로 불린 수녀들은 그의 가족이 돼줬다. 수녀의 베일을 벗겨 도망가는 등 짓궂은 장난을 칠 때는 알로이시오 신부가 직접 혼내기도 했다. 유 씨는 “신부님이 자기 무릎에 앉혀 엉덩이를 신문지로 10대 때리는 수준이었다. 많이 맞아봤다”며 웃었다. 머지않아 소년의집에서 나온 유 씨는 선원·화물 기사 등으로 일했다. 1988년에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됐다.

그는 “영화숙에 있을 때 소·돼지에게 먹이 주는 일을 해봤다. 돼지가 다치거나 밥을 안 먹으면 내가 맞았다. 그야말로 돼지만도 못했다”고 했다. “그동안 피해 신고는 꿈도 꾸지 못했어요. 누가 믿어줄까 싶었거든.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이곳에서 죽은 아이들을 위해 막걸리를 뿌려줬어요. 나 같은 생존자들이 잘살길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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