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이후 영화숙·재생원을 비롯한 부산의 수많은 부랑아 시설에서 행정과 민간의 주도로 대규모 인권유린 사태가 벌어졌지만 진상 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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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사하구 장림동에 있었던 재생원과 영화숙. 왼쪽 사진이 재생원으로, 오른쪽 사진의 앞부분이 영화숙으로 추정된다. 출처=사진으로 본 마리아수녀회 40년사 |
31일 부산시에 따르면 현재까지 접수된 영화숙·재생원 강제수용 피해 신고는 전무하다. 영화숙·재생원은 1960년대 후반 부산 최대 부랑아 시설로, 이곳에서 대규모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2018년 12월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 신고 센터’를 개소해 진상 규명을 돕고 의료비를 지원하는 등 체계적으로 형제복지원 피해자를 관리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국제신문은 재생원에서 탈출한 손석주(59·사진) 씨를 어렵게 만나 부랑아 시설의 인권 유린 실태를 들었다. 그는 50년 전 생지옥에서 겪은 악몽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1960년대 부산 최대 부랑아 시설 중 하나인 재생원에서 1년 이상 갇혀 살았다. 감옥보다 열악한 환경과 구타가 일상인 인권유린의 현장에서 그는 살아 남았다.
경남 양산 물금이 고향인 손 씨는 아버지와 살았다. 어머니는 어릴 적 집을 나갔다. 11살 무렵이던 1973년 손 씨는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뛰쳐나와 부산 중구 일대에서 신문을 팔았다. 당시 어린 신문팔이에게는 숙식이 제공됐다. 부모 없이 거리를 배회하며 걸식하는 사전적 의미의 ‘부랑아’와는 처지가 달랐다.
그런데도 손 씨는 재생원으로 끌려 갔다. 부산데파트 앞에서 일하다 ‘돈벌이를 소개해 주겠다’며 밥 한 그릇을 사준 낯선 아저씨에게 끌려간 것이다. 옛 부산항연안여객터미널 근처에 있던 재생원 사무실에 들러 간단한 입소 절차를 밟은 그는 사하구(당시 서구) 장림동 수용소에 들어갔다.
그의 기억 속 재생원은 사설 감옥과 같았다. 기와지붕을 쓴 단층 건물마다 10평이 채 안 되는 철창 방이 서너 개씩 딸려 있었다. 햇볕을 쐬는 오후 30분을 제외하고 철창 방은 늘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소대’로 불린 이 방에는 10살 아이부터 쉰 살이 넘은 성인까지 마구잡이로 수용됐다. 한 소대의 인원은 30~50명.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만 했다. 소대 방 내부의 재래식 화장실은 매일 끔찍한 악취를 풍겼다.
수용자 관리는 군대식이었다. 원생 중에서 중대·소대·분대장을 뽑았다. ‘완장’을 찬 그들은 자신들도 피해자이면서 별 이유 없이 폭력을 쓰거나 수용자를 괴롭혔다. 손 씨는 “덩치 좋고 힘센 놈들로 뽑았다. 방망이나 각목을 들고는 기분 내키는 대로 때렸다. 나도 방망이에 맞아 오른팔이 부러졌는데 부목만 달랑 댄 채 치료받지 못했다. 지금도 팔을 다 펴지 못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소대장들은 수용자들끼리 싸움도 붙였다. 진 사람은 무자비하게 폭행당했다. 잠잘 땐 예쁘장한 원생을 옆에 뉘어 남색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식사는 하루 두 끼였다. 강냉이죽이나 보리밥 정도가 다였다. 부실한 끼니에 반복되는 가혹 행위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는 원생도 적지 않았다. 손 씨는 “아이가 가마니에 덮인 채 수레에 실려 야산으로 옮겨지는 모습을 4, 5번 봤다. 죽은 아이를 산에 묻으러 가는 것으로 보였다. 선감학원·형제복지원에서만 군사정부 시절의 인권침해가 있었던 게 아니다. ‘분명히 있었던 일’을 이제는 알려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