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세월 군·검·경의 캐비닛 속 문서에서만 존재하던 부마민주항쟁의 기록 일부가 역사적 사실로 거듭났다. 문건에는 나타나지만,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증언이 부족해 진상 규명에 난항을 겪던 사건에 대한 목소리가 확보된 것이다. 오랫동안 활자 속에 갇혀 있어야 했던 그날의 진실은 마침내 빛을 보게 됐다.
부마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는 ‘기록으로만 남은 사람들(국제신문 2019년 8월 30일 자 6면 보도)’의 실체를 일부 규명했다고 7일 밝혔다.
위원회가 공개한 규명 사례는 구체적으로 ▷부산여대(현 신라대) 침묵 행진 ▷고 서회인 씨 사과탄 사건 ▷계엄군 전차-택시 충돌 사고 등이다. 이 사건들은 군·검·경과 정부의 문건에는 기록이 있지만,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증언이 부족했다.
부산여대 침묵 행진은 1979년 10월 18일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일어난 첫 번째 대규모 시위였다. 부산 전역에 총칼을 지닌 군인이 배치된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유신 독재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날의 기억을 증언하는 이들을 찾지 못해 실체 확인에 애를 먹었다. 어렵사리 확보한 증언자들은 그날의 행진이 침묵 속에서 이뤄진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유신 철폐’라는 구호가 울려 퍼진 분명한 항거였다는 것이다.
서회인 씨 사건은 국가의 폭력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디까지 망칠 수 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당시 동주여상(현 동주여고) 야간부 2학년이었던 그는 그해 10월 17일 귀가하던 중 사과탄으로 불리는 소형 최루탄에 맞아 얼굴을 심하게 다쳐 침례병원(당시 동구 초량동)에 입원했다. 이후 그의 인적사항을 확인하는 데도 어려움이 컸다. 부마항쟁을 취재한 조갑제 기자의 저작 ‘유고’에는 ‘서혜인’, 군의 자료에는 ‘서해인’으로 그의 이름이 잘못 표기됐던 탓이다.
그의 진짜 이름과 당시의 기억은 지난 3월 서 씨 유족의 증언이 확보되면서 실체가 드러났다. 유족들은 서 씨가 사과탄을 맞은 영향으로 폐를 다쳐 오랫동안 고통받았으며, 그 영향 때문인지 2000년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결핵을 앓았다고 했다.
전차-택시 충돌 사고는 부마항쟁의 대표적 ‘유언비어’였다. 탱크가 영업용 택시를 납작하게 만들어 승객 4명이 즉사했다는 소문이다. 군의 내부 보고에 이 사고는 택시의 일방 과실로 군 탱크와 충돌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당시 사고는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탱크가 일으킨 사고였으며, 사망자는 없고 부상자가 2명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심범 기자 mets@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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