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대생 학교~서면 가두시위 진행
- 대다수 경찰에 맞서며 현장 지켜
- 항쟁 첫 시위란 역사적 지위 얻어
- 하굣길 최루탄 피해 입은 여고생
- 치료 후에도 후유증에 삶 망가져
- 군부는 사과 없이 돈으로 회유만
부마민주항쟁 발생 3일 차인 1979년 10월 18일. 박정희 정권은 이날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도처에 깔려 시민에게 총을 겨눴다. 대학은 휴교에 들어갔다. 도열한 탱크, 시민을 폭행하는 계엄군은 ‘국가폭력’의 현장이었다.
부산여대(현 신라대) 행진 사건은 계엄령의 무력을 이겨내고 불의에 맞선 첫 번째 시위였다. 지금까지 이 사건은 ‘침묵 시위’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당하게 ‘유신 철폐’를 외치며 항거했다는 사실이 시민의 목소리로 밝혀졌다.
고 서회인 씨 사과탄 사건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국가 폭력의 잔혹성을 드러낸다. 국가는 망가진 그의 인생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고, 얄팍한 돈 봉투로 사안을 마무리하려 했다. 당시를 증언한 목소리가 없었다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을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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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찰이 시민의 집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모습. 그 동안 문서 곳곳에 기록으로 남았던 당시 항쟁의 진실이 시민의 증언으로 새로운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국제신문 DB |
■치마·구두 차림으로 “유신철폐”
부산여대 침묵 행진과 관련한 기록은 당시 내무부의 자료와 부산시 시정 일지 등에 남아 있다. 기록을 보면, 학생들은 18일 오전 일찍부터 휴교령이 내린 학교로 모여들었다. 500명까지 불어난 학생들은 이날 오전 9시30분께 학교(연제구 연산동)를 나서 서면으로 향했다. 서면 로터리에 도착한 학생들은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기록은 이날의 행진이 침묵 속에서 이뤄졌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날을 기억하는 참가자의 말은 다르다. 당시 서면 로터리로 행진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유신철폐’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에게 호응한 시민의 참여와 박수도 이어졌다. 시위 선두가 서면에 도착했을 땐 이미 167명 규모의 경찰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스커트와 구두 차림으로 시위에 참여한 대다수 학생은 해산에 불응했다. 56명은 1시간 이상 현장을 지켰고, 결국 이날 10시30분 동래경찰서로 연행된 뒤 훈방 조처됐다.
증언이 확보되면서, 부산여대 행진 시위는 계엄령 포고 이후 진압대에 맞서 유신 철폐를 외친 첫 시위라는 역사적 지위를 얻었다. 다만 현재로서는 더 많은 증언이 필요한 상황이다.
위원회가 접촉을 시도한 당시 학생은 지금까지 모두 32명이다. 그러나 확보된 증언은 비공식 진술을 포함해 2건에 그친다. 연락을 받은 이들은 ‘부마항쟁은 역사에 불과하다’거나 ‘지나간 일이다’며 증언을 거부했다. 부마항쟁 참여자는 곧 불순분자라는 레드 콤플렉스가 42년이 지난 지금까지 참여자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국가폭력에 망가진 여고생의 삶
국가 폭력으로 삶이 송두리째 파괴된 고 서회인 씨 사건은 단편적 기록으로만 존재했지만, 당시 증언이 확보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갑제 씨의 저서 ‘유고’나 계엄군 기록에 따르면, 서 씨는 1979년 10월 17일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사고를 당했다. 밤 9시50분 중구 대청동 당시 한국은행 인근 육교에서 경찰이 던진 소형 최루탄(사과탄)에 얼굴을 맞았다.
눈앞에서 사과탄이 터지며 그의 코와 눈, 귀, 이마가 찢어졌다. 곧바로 침례병원으로 옮겨진 서 씨는 6개월에 걸쳐 치료를 받았다.
당시 서 씨를 직접 돌봤던 이모는 “치료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 학교나 경찰서, 교육청 등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 보상을 요구했지만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서 씨만 있을 때 군인 장교가 병원에 찾아와 20만 원을 건네고는 치료비에 보태라고 말했다 한다.
서 씨는 정신적으로도 오랫동안 고통받았다. 치료를 끝마친 뒤에도 눈 주변이나 머리, 팔 등 몸 여기저기에서 콩알만한 파편이 나와 고통을 겪었다. 얼굴의 상처는 성형수술을 받아 회복했지만, 사고의 여파로 폐를 다쳐 잔기침이 잦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했다. 사고 2년 뒤엔 결핵 판정을 받아 치료를 계속했지만 호전되지 못했고, 2000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결핵과 싸워야 했다.
이 같은 영향으로 그는 평생 일자리를 가지지 못했다. 본래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고, 급기야 1998년에는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다.
부마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는 서 씨를 부마항쟁 피해자 중 ‘사망자’로 볼지 여부를 심의하고 있다. 신심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