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상규명 위해 피해자 증언 절실
부마항쟁 당시 국가폭력에 굴하지 않은 시민의 항쟁은 기록으로 다수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실체를 뒷받침할 목소리가 부족한 실정이다.
국방부 합동참모본부가 만든 문건 ‘부산 사태’를 보면, 1979년 10월 18일 오전 9시10분 부산 남구 우암동 성지공업전문대학(현 부산과학기술대학)에서 해산에 불응하는 학생 100여 명이 경찰과 대치했다. 이날은 0시를 기점으로 계엄령이 내려져 지역 모든 대학이 휴교에 들어갔다. 경찰의 해산 명령에도 학생들은 30분 이상 결집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날의 진상을 기억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오지 않는다. 유일한 증언자인 이 학교 학도호국단 간부는 “그 날이 마침 축제날이라 간부 몇 사람이 일찍 등교했지만, 군인들을 보고 일찍 피신해 학생이 운집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계엄령이 떨어진 이날 부산 각지에서 유신에 항거하는 시위가 있었다는 기록은 무수히 많다. 계엄령 이후 당시 부산에는 해병대 7연대가 서면 로터리를 중심으로 배치돼 있었다. 해군본부 군사편찬과 ‘해병1사단 부대사’에는 1979년 10월 18일 오후 5시부터 19일 0시20분까지 온천동 서면 범내골 명륜동 안락동 연산교차로에서 시위가 일어나 진압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당시를 회고하는 증언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했다. 이날 서면에서 일어난 시위는 증언이 일부 확보됐지만, 나머지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시위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부마항쟁진상규명위원회 차성환 상임위원은 “지난 3월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수집한 자료를 통해 항쟁 당시 부산·마산 즉결심판 대상자 등 531명의 피해자를 추가 확인했다. 이 중 아직 피해 신고를 하지 않은 분들에게 신고 안내문을 보냈다. 그러나 안내문을 받은 322명 중 피해 사실을 신고한 이는 95명에 불과하다”며 “항쟁의 진상을 밝히고 이들의 경험을 정확히 기록하려면 당사자의 증언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신심범 기자 met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