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연제구에 사는 A(36) 씨는 한 번도 회사에 다녀본 적 없다.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취직을 준비할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늦은 나이에 자녀를 낳은 그의 부모는 A 씨가 고등학생 때인 2003년 퇴직했다. 퇴직금으로 고깃집을 열었지만, 당시 IMF 못지않은 불경기가 들이닥친 탓에 2년 만에 폐업했다. 직장이 없는 부모는 아무런 돈도 마련해올 수 없었다. 게다가 A 씨에겐 아직 초등학생밖에 안 된 동생이 둘 있었다. 당장 생활비가 필요했다.
A 씨는 군에 다녀온 2007년 이후 줄곧 알바만 했다. 학교는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저녁에는 식당에서 음식늘 날랐고, 새벽엔 PC방에서 카운터를 봤다. 이렇게 한 달에 100만 원가량을 벌었지만, A 씨는 돈 만 원조차 자신을 위해 써본 적 없었다. 집에 생활비를 대는 것만으로 버거웠다. 한도까지 끌어온 은행 빚을 갚지 못해 20대 중반에 이미 신용불량자가 된 처지였다. 이런 생활은 그의 동생이 직장을 가질 때까지 이어졌다. 어느덧 마흔이 가까운 나이가 된 그는 새 직장을 구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스펙도, 경력도 없는 그를 직원으로 뽑아줄 회사는 아무 데도 없었다.
일부 국가에선 A 씨 같은 어린 부양자를 ‘영 케어러(Young Carer)’라 부른다. 이들은 어린 나이에 가장이 돼 과도한 경제적 부담에 시달린다. 이 때문에 또래들과 달리 취업이나 학업을 준비할 여력이 없다.
선진국은 20년 전부터 영 케어러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영국에는 49만 명이, 호주에는 23만 명에 달하는 영 케어러가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일본도 지난해 처음으로 전국 단위 실태조사에 나섰다. 저출산과 고령화, 한부모 가정의 증가 등으로 영 케어러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실태조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부산 중구에 전국 최초로 영 케어러를 지원하는 조례가 생겨나 눈길을 끈다. 중구의회는 ‘돌봄제공자인 아동·청소년 지원 조례안’을 제정했다고 18일 밝혔다. 영 케어러를 위한 조례가 생긴 건 전국에서 중구가 처음이다.
조례는 영 케어러를 만 19세 미만의 돌봄 제공자인 아동·청소년으로 규정했다. 이들이 개인으로 존중받고, 건강하고 문화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장받을 수 있도록 지원 계획을 추진하는 게 조례의 골자다. 이를 위해 구민과 지역 사업자, 관계 기관, 민간지원단체 등 다양한 주체가 서로 연계해 영 케어러가 고립되지 않도록 지원 체계를 구축해 상호 협력해야 한다고도 명시됐다.
발의자인 김시형 중구의원은 “영 케어러의 부담이 과도하거나 장기화하면 학업과 진학, 취업에 영향을 미친다. 주변에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는 환경이라면 사회적, 정신적으로 고립될 우려가 크다”며 “영 케어러에 대한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은 우리 사회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배려이며 미래 자산에 대한 투자다. 이번 조례 제정을 계기로 범국가적인 지원 방안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신심범 기자 met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