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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의 낱말로 푸는 인문생태학]<499> 현황과 홍황: 천지와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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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1-02-01 19:31:31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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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천-따 지-검을 현-누를 황! 익숙한 천자문 첫 문장인 천지현황(天地玄黃)이다. 성경 첫 문장도 비슷하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창세기 1장 1~2)… 천지현황은 무슨 뜻일까? 직역하자면 ‘하늘과 땅은 검고 누랬다(The sky and the ground were black and yellow)’고 할 수 있다. 한자사전에도 검을(black) 현(玄)이라 하고, 누를(yellow) 황(黃)으로 나와 있으니 맞다. 한영사전에도 ‘검다’는 ‘black’혹은 ‘dark’다. 그러니 맞는 번역이 분명하다.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을까? 아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질 게 있다. 검을 현을‘어둡다’의 의미로 설명하면 빗나가기 쉽다. 사전적 정의로만 해석하면 천지현황의 의미를 헤아리기 어렵다.

1000자문 첫 문장 천지현황, 우주홍황
천자문의 저자는 왜 천지흑(黑)황이라 하지 않고 천지현(玄)황이라 했을까? 딱 1000자로 된 천자문에는 겹치는 글자가 한 자도 없다.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주흥사(周興嗣 470~521)는 양무제의 명령으로 하룻밤 사이에 중복없는 1000자문을 지은 후 백발이 되었단다. 천자문에 어려운 글자들이 많은 이유다. 천자문은 절대로 초급한자 교재가 아니다. 한자들도 어렵고 중국 고대사를 꿰어야만 그 철학적 의미를 올바로 가늠할 수 있다. 이 천자문에 검다(black)는 뜻을 가진 흑(黑)이라는 글자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흑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현이라는 한자를 쓴 것도 아니다.

천자문 저자의 의도를 헤아려 필자가 달리 번역하자면 이렇다. ‘하늘과 땅은 가물거리며 누리끼리했다(The sky and the ground were dim and yellowish).’검고 어둡기보다 허연 아지랭이가 희미하게 가물가물거리듯 천지가 불분명하니 혼돈(Chaos) 상태였다는 뜻이다. 천지현황에서 현은 가물거리는 카오스다. 성경 창세기 첫 구절의 혼돈도 똑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이렇게 바뀌어야 맞다. 하늘 천-따 지-가물 현-누를 황….

이어서 나오는 문장까지 알아야 그 뜻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다. 흔히 천자문을 4자×250개=1000자문이라 하는데 4자×2문×125개=1000자문이라 해야 더 정확하다. 천자문은 네 글자로 된 두 사자성어가 하나의 뜻으로 이어져 엮이기 때문이다. 천지현황 다음에 이어져 엮이는 사자성어는 우주홍황(宇宙洪荒)이다. 그냥 사람사는 집(house)이 아니라 시공간의 집인 우주(宇宙)가 드넓고(洪) 거칠다(荒)는 뜻이다.

하늘 천-따 지-가물 현-누를 황 → 공간집 우-시간집 주-넓을 홍-거칠 황! 천지는 모양(shape) 없이 가물거렸고 색깔(color)은 누리끼리했으며, 우주의 범위(scale)는 드넓고 그 질감(texture)은 거칠다는 뜻이다. 천지우주를 이보다 더 잘 나타낼 수 있을까? 현대과학에선 특이점(Singularity)의 대폭발 이후 팽창하는 우주를 설명한다. 이는 첫자문 첫 문장의 각주(脚註)에 불과할지 모른다. 아득한 천지우주를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검어지기보다 가물거린다. 현(玄)해진다.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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