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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45> 오호, 고려여, 조선이여!

기득권 버린 허균, 독립 외친 백성…한민족 뼛속 깊이 새겨진 풍류정신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12-13 19:54:58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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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누르고 성리학 강조한 조선
- 신분 차별·여성 억압 세상 도래
- 신선된 치원 통탄하며 고개 돌려

- 천민·승려 등 두루 교류한 허균
- 차별 타파와 인재 등용 등 추구
- 안중근 히로부미 척살 기상 과시
- 1919년 팔도선 만세운동 물결

- 치원, 천년 만에 청년으로 귀환
- 우리 곁의 누군가로 살아 있어
- ‘맑은 정신’ 말하는 그에 주목을

고려는 당대 세계를 호령한 원(元)나라의 집요한 침략에도 허리는 굽혔으나 나라를 내주지는 않았다. 그들의 말발굽이 휘몰아치는 곳마다 수많은 나라가 파국을 맞았으나 기어이 살아냈으니 허리를 굽힌 것은 권력의 치자(治者)요, 지켜낸 것은 만백성의 정신이다.
   
3.1 만세운동(왼쪽)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은 한민족 풍류정신의 발현이다. 오른쪽 사진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사형 집형에 앞서 조선 가톨릭교회의 평생 멘토인 빌렘 신부와 두 동생에게 유언을 하는 모습. 이후 빌렘 신부는 살인자를 만나지 말라는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명령을 어기고 안중근에게 성사에 베풀었다고 처벌을 받았다.
승려는 창칼을 들어 대적하며 대장경 불사를 일으키고 백성은 한마음으로 따랐으니 부처의 가피 이전에 정신의 승리인 것이다. 그러나 중심이었던 도량이 타락해 불전(佛殿)에 황금빛이 넘실거리고 승려는 부처를 팔아 뱃속을 채우니 기어이 나라가 망했다. 오호, 고려여!

새 나라가 들어서니 조선(朝鮮)이다. 개국(開國)은 언제나 희망을 드리우지만 시작부터 뭔가 이상하다. 공신(功臣)이 나서 언제나 현명한 왕으로 이어질 수 없으니 의정부를 중심으로 신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혼군(昏君)의 역사가 선명하니 일리는 있다.

   
그러나 신하의 명철함은 권력의 유혹에 스스로 초연할 수 있을까. 과연 이내 한계가 드러난다. 뜻으로 나뉘어 패를 짓더니 사소한 빌미로도 피의 옥사(獄事)를 망설이지 않는다. 명분을 내세워봤자 권력의 독점을 위한 아귀다툼임은 세 살 아이도 안다.

더 큰 문제는 정신이다. 우리의 정신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서국(중국)의 주자(朱子)가 정리한 성리학(주자학)이다. 덩치가 크다 하나 아득한 주(周)나라 이후로 한 번도 500년을 보존한 적 없는 그들의 철학에 맹종하며 알아서 대국이라 머리를 조아린다. 외교도 아닌 굴종일 뿐이니 다른 민족이 얕잡아 보아도 부끄러움조차 모른다.

가관이다. 아무리 고려 망국의 원죄가 있다 해도 불전을 훼손하고 승려를 노비처럼 여기다니! 유자(儒者)가 금강산, 지리산 유람에 나서면 승려는 가마를 메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하니 소나 나귀에 다름없다. 치원이 석가를 받아들이고 글을 남겼다 하여 문장과 필체마저 폄훼하는 이도 있다. 학자라 자처하는 그들의 문장과 필체에 치원을 찬사하는 기록은 보지 못했다. 더욱 해괴한 것은 사람에 대한 근본 인식이다. 신라 골품제에 통탄하고 고려에서 희망을 보았건만 다시 철벽의 세상이다. 반상(班常)의 옹졸함은 낳아준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게 하고, 여성은 문발 안에 가두고 손발을 묶었으니 그저 숨만 쉴 뿐 인간으로 살아있는 것이라 할 수 없는 지경이다. 사람이면 누구라도 자연의 한 모습인데, 필히 망하리라!

■퓽류도 정신 잇는 허균도 끝내…

   
스스로 기득권을 내던진 허균의 ‘홍길동전’도 풍류도의 재현이다.
왜란이다! 왕이라는 자는 백성을 버려두고 야반도주해 기어이 국경까지 넘으려 한다. 다행히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무장이 있어 숨통이 트이니 공(功)을 시기한 참소가 이어지고 왕은 그에 장단을 맞춘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번에도 백성이다. 아직 기개가 살아있는 장군과 선비가 앞장서고 백성과 승려가 뜻을 모으니 국토를 보존하고 나라를 지켜낸다.

환란을 겪고서도 왕과 신하는 갈등하고, 반목하는 세력들은 또 붕당으로 아귀다툼이다. 치원이 동굴을 나서니 이번에도 무영이 땅을 밟아 눈과 귀가 된다.

교산(蛟山) 허균. 대대로 고관을 지낸 명문가의 자손으로 일찍부터 신동으로 불리는 천재성까지 받았다. 형제는 저마다 명성을 알렸고 누이는 저 유명한 난설헌이니 빠진 것 없는 축복의 태생이다.

9살에 시를 짓고 26살 무렵부터 관직에 나갔으나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아 물러나는 곡절이 있었다. 탄핵의 사유는 지방관리로 한양의 기생을 불러 가까이했다거나 불교를 믿어 염불과 참선을 했다는 이유 등이다.

억불숭유의 나라에서 불교의 교리를 따랐으니 이단이고, 기생은 물론 서자 승려 무사 천민 등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두루 교류한 자유인으로 스스로의 행동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학문의 기본은 유학에 두었지만 불교, 도교 또한 깊이 공부하며 진리를 탐구했다. 자신의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신분차별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백성의 복리 등을 추구하지만 현실의 벽을 깨기는 불가능하다.

당장은 불가능해도 백성의 마음에 불씨는 심고 싶음인가. 허균은 소설 ‘홍길동전’을 짓는다. 홍길동은 한양 판서 집안의 서자로 빼어난 자질을 보였으나 천한 태생의 한계로 아버지를 아버지로, 형을 형으로 부르지도 못한 채 오히려 재주가 화근이 될까 두려워한 가족의 위협에 집을 나와 도적의 두목이 된다. 그저 도적이 아니라 활빈당을 자처하며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백성을 돕다가 율도국(硉島國)이라는 이상국가를 세운다는 내용이다. 치원은 찬탄한다. “조선에도 풍류도의 정신은 살아있구나! 그렇게나마 마음의 불씨를 지킨다면 반드시 사람이 사람다운 세상이 오리라!”

허균은 끝내 역모죄로 저자에서 능지처참을 당하니 광해군 10년이다. 치원은 “조선이 기어이 나라를 잃겠구나!” 장탄식하고 지리산으로 학의 머리를 돌린다.
   
1910년 8월 14일 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과 이를 촬영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오른쪽)의 현대적 완성은 우리의 숙제일 것이다.
■안중근 기개도 한민족의 풍류정신

오호, 통재라! 이 땅에 나라가 들어서고 3000년이 넘도록 한 핏줄로 주인은 바뀌어도 이적(夷敵)에게 내준 적이 없건만 기어이 왜적에게 빼앗겼다. 그러고도 왕실의 주인과 대신은 강도의 눈치를 살피며 제 한 몸 보존하기에 급급하니 백성은 주인 잃은 개처럼 도적의 발길질에 갈 곳 모르고 쫓기기만 한다.

이 꼴을 보려고 천년을 기약한 것이 아니건만 치원은 통탄하며 현신(現身)해 찬바람 매서운 북쪽으로 걸음을 서두니 1909년 청(淸)나라 땅 하얼빈이다. 그해 10월 26일 아침, 대한의 30세 청년 안중근은 조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에게 세 발의 총탄을 먹여 척살하니 나라는 잃었어도 백성의 기상은 건재함을 만방에 과시함이다. 안중근이 ‘우레 코레아(대한 만세)’를 외치니 치원과 무영도 목청껏 ‘만세’를 삼창한다.

안중근은 뤼순(旅順)감옥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으면서 ‘동양평화론’를 집필하기 시작하니 그 의연하고 거룩함에 왜국의 관리와 헌병마저 머리를 숙인다. 그러나 당당한 법정진술의 파장이 두려워 서둘러 사형을 선고하니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하고 ‘동양평화론’ 집필을 완성할 때까지 사형집행을 미뤄주기를 원한다. 완력은 있으나 정신이 왜소하니 어찌 그 큰 뜻에 부끄럽고 두렵지 않으랴. 1910년 3월 26일, 서둘러 사형을 집행하니, 슬프다! ‘동양평화론’은 서문에 그치고 만다.

고난이 뼈에 사무칠수록 정신은 더욱 시퍼런 배달의 민족이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경성을 필두로 팔도에 저항의 만세운동이 불길처럼 타오르니 세계만방이 경탄한다. 바로 그것이 한민족의 풍류정신이다! 누가 뭐라 가르치지 않아도 뼛속에 새겨져 잊지 않으니 반드시 세계 속에 우뚝 일어서리라. 치원은 이제 신선으로 몸을 감추지 않고 천년 만에 청년의 육신이 된다.

우리 곁의 누군가는 최치원이다. 크게 목청을 높이지 않아도 단편의 글로, 낮은 호소로, 옅은 미소로 반 발쯤 앞서 함께 가자는 이가 그일지 모른다. ‘자연과 하나 되자’, ‘맑은 정신으로 살자’ 하는 그에게 귀를 기울이자.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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