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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44> 새 나라가 궁금해 동굴 나서다

팔만대장경 불심은 또다른 풍류도 … 난세 고려를 지켜내다

  •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  |   입력 : 2020-12-06 19:34:28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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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세월 동굴서 은거한 치원
- 무영과 함께 신선이 돼
- 훗날 궁금해 개경을 둘러보니
- 백성 얼굴에 희망 보여 안심
- 정치는 무신정권 전횡 걱정

- 빼어난 필력 백운거사 이규보
- ‘동명왕편’ ‘동국이상국집’ 저술
- 최충헌 눈에 들어 출셋길 씁쓸

- 무영이 새로운 술 담솔 올리며
- 북방세력의 기세 걱정하니
- 치원 “풍류정신이 나라 구할 것”

치원이 오랜만에 동굴 밖으로 나서니 무영은 뒤를 따른다. 반듯하게 정좌해 책을 읽고 차를 마시다가 눈이 피로하면 조는 듯 선정(禪定)에 들기도 하고, 무영이 빚은 솔송주를 마신 뒤에는 편히 누워 깊은 수면에 들기도 했다. 세월의 흐름을 잊으니 며칠을 보냈나 싶은데 그 사이 300년쯤 흘렀을 것이라 무영이 알려준다. 그러고 보니 무영이 동굴에 든 것도 꽤 여러 날이다. 어느 날 문득 동굴 속에 난 길을 더듬어보고 싶다며 들어온 뒤로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과일을 비롯한 요기거리며 차와 솔송주를 줄곧 내왔다. 무릉도원이라도 찾은 것인가 생각하지만 그다지 궁금하지 않아 치원은 묻지 않았고 무영도 입에 담지 않았다.
   
최치원의 풍류도는 고려 초기 잠시 ‘선랑’으로 이어졌지만 곧 맥이 끊어졌다. 팔만대장경은 불심이 풍류정신이 되어 세계제국 원나라로부터 나라를 지킨 상징이고 유산이다. 사진은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합천 해인사 장경각 판전 내부. 합천군 제공
“새 나라가 섰더냐?” 치원의 물음에 무영이 답한다. “송악의 왕 씨가 고려를 세워 주인이 되었습니다.” “신라의 마지막은 어떠했느냐?” “마지막 경순대왕께서 세(勢)의 흐름에 순응해 나라를 바쳤기에 백성의 목숨과 살림은 비교적 온전했습니다.” 치원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비감하나 의연하였으니 천년 왕국의 마지막 임금으로서 하늘과 백성에 도리는 다했구나.” “고려는 송악에 왕궁을 세우고 개경(開京)하였습니다. 한번 둘러보시렵니까?” 치원이 동굴 밖으로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 천년이 되지 않아 땅에 현신(現身)하기는 민망하니 네가 구름 아래로 내려가거라. 나는 학 위에서 네 눈과 귀로 보고 들으리라.”

치원의 머리카락과 긴 수염은 은빛으로 구름 위 백학에 오르면 그대로 일체가 된다. 무영은 동굴에 처음 들던 서른 갓 넘은 그때의 모습으로 피부는 백옥의 윤기가 돌고 남장한 몸체는 날렵한 조각의 형상에 근육은 돌처럼 단단하다. 아마 도원 어느 곳에서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리라. 세상 사정에 어둡지 않은 것은 도원에서 학을 불러 밖을 둘러보았음이니 스스로 모든 것을 터득한 것이다. 선계(仙界)에 드는 것이 어디 가르침과 수련으로 되는 일이던가. 세운 뜻에 지극하여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이니 자연에서 태어나 다시 자연과 하나 되는 순리임에도 모두가 난망하다 하니 오직 세속에 연연한 그 미련 때문이리라.

치원이 백학을 불러 구름 위로 오르니 무영은 청학을 불러 뒤를 따른다.

■이규보인가, 최치원인가

   
고려 때 ‘백운거사’ ‘삼혹호’란 호를 가졌던 불우한 천재 지식인 이규보와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
개경은 신라 왕경에 못지않게 화려하다. 아니다, 세월이 흐른 만큼 더욱 번성하고 서국(중국)이며 더 먼 서쪽과 남쪽 나라에서 바닷길로 들어온 문물들로 호화롭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다행한 것은 오는 도중에 보았던 개경 밖 백성의 삶이다. 무거운 세금이나 관리의 탐학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듯 했으나 고단하고 곤궁한 중에도 백성의 얼굴에는 희망이 있었다. 여전히 노예가 있고 신분의 구분도 있지만 신라의 골품제와 같이 완고하지 않으니 노예가 승(僧)이 되기도 하고 능력으로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람은 길이 있으면 그것으로 희망을 삼을 수 있고 기꺼이 고난을 견뎌내니 바야흐로 사람의 세상이 열린 것인가.

풍류도의 정신은 개국 초기 ‘선랑(仙郞)’이라는 제도로 이어졌으니 신라의 화랑, 고구려의 ‘조의선인(皁衣先人·청년 무사집단)’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국기의 긴장이 풀리며 문신(文臣)이 득세하니 유명무실하다가 사라져 버렸다. 나라의 안정과 번성은 문과 무가 서로를 존중하고 보완하는 바른 정치에서 비롯되고, 청년으로 하여금 호연지기를 길러 다가올 훗날을 대비하는 것으로 천년을 기약할 수 있기에 풍류도를 남겼거늘,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과연 핍박받던 무신들이 들고 일어나 정권을 장악하니 왕마저 눈치를 보는 무도한 세상이 되었다. 그래도 문이 아주 절멸될 수는 없으니 누른빛이나마 잎이 붙어있고 씨앗은 움트니 그것은 또 다른 희망이다.

땅에 발을 디딘 무영은 이규보(李奎報)라는 학자의 길을 더듬는다. ‘백운거사(白雲居士)’라 호를 쓰니 치원의 호 ‘고운’을 생각하게 하고, ‘삼혹호(三酷好)’를 자칭하는 것은 시와 술, 거문고를 즐겨서라니 자신을 보는 듯싶어 치원은 멋쩍은 웃음을 머금는다. 그래서인가, 규보는 ‘신당서예문지(新唐書藝文志)’에 치원의 ‘계원필경(桂苑筆耕)’과 ‘사육집(四六集)’을 실으면서 ‘열전(列傳)’을 따로 두지 않은 것은 빼어난 문장을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 일갈했다.

   
그의 빼어난 문장은 고려에서 으뜸이라 평을 듣고, ‘동명왕편(東明王篇)’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등의 저술은 민족의식과 드높은 학식을 보여준다.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지 않고 학자, 승려 등 여러 인사와 스스럼없이 교제하는 인간미는 선비의 전형을 보여주나 비난의 세평도 적지 않다. 빼어난 문재(文才)로 문한직(文翰職)의 명성을 얻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한때 장자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어떤 인위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낙토)’을 추구하며 백운거사라 호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은 당대 무신정권의 우두머리 최충헌을 국가적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지어 발탁되고, 측근이 되어 머리를 숙이며 일신을 지켰기 때문이다.

치원은 씁쓸하다. 사람은 태어나면 누구나 바라는 바를 마음에 품고, 그에 노력하며 바른 이치를 깨쳐 뜻을 세운다. 그러나 세운 뜻을 올곧게 지켜가기는 천길 벼랑길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것과 같으니 대개는 되돌아서 야합하거나 걸음을 멈춰 은둔하게 된다. 차라리 평범하여 뜻이 날카롭지 않으면 고뇌의 자책은 없으련만 저절로 받은 재주의 빼어남은 그만큼의 무게로 책임이 되니 태초의 공평함이 그것인가 싶다.

■몽골 기세에 고려의 운명은

   
우리나라 증류주는 원나라에서 유래됐다. 사진은 함양의 대표적 증류주 ‘담솔’.
돌아온 무영이 술병을 내민다. 뚜껑을 여니 번지는 향이 여태의 술과는 다르다. 단번에 강함을 느낄 수 있고 그 향이 정신까지 얼얼하게 한다. “무슨 술이더냐?” “북방에서 전해져온 술인데 발효된 원액을 끓여 증류한 것이라 합니다.” 얼른 한 모금을 삼키니 단번에 목에서부터 뱃속까지 불이 붙은 듯 뜨거우면서도 상큼한 향이 정신을 깨운다. “좋구나! 그자의 삼혹에 술이 빠질 수 없는 이유를 알겠다, 하하!” 탄복하는 치원의 모습에 무영은 빙긋 웃는다. “빚는 법을 배워왔으니 돌아가면 솔송주로 그리해 보겠습니다.” “술을 증류하니 그 영혼이요, 솔의 정기를 담는 것이니 그건 ‘담솔’이 되겠구나.”

무영의 낯빛에 그늘이 드리운다. “고려의 앞날이 심상치 않습니다. 북방세력이 요(遼)와 금(金)나라로 서국의 주인이 된지 300년이 넘었는데 다시 북방에서 새바람이 몰아치는 모양입니다.” 치원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얼핏 들어보았다만 지금껏 없었던 기운이니 고려나 서국뿐 아니라 세상이 요동칠 듯싶고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지극한 불심으로 대장경 불사를 일으킨다니 고려는 나라를 아주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무영은 고개를 갸웃한다. “대장경으로 어찌 나라를 지킨다는 것인지요?” “지금 그것은 또 다른 풍류도다. 만백성이 한마음이 되면 어떤 고난에도 숨을 멈추지는 않는 법이다. 그것이 정신의 힘이다. 이제 우리는 그만 돌아가자.” 치원은 학의 머리를 돌려 남쪽으로 향한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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