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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42> 귀 씻어 속세와 절연하다

“신선으로 1000년 살아 이 땅과 백성, 나라를 지켜보리라”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11-22 19:37:35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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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원, 산문 벗어나 칠불암 지날 즈음
- 여명에 학이 된 듯 청정 기운 한가득
- 귀 씻은 뒤 화개천 바위에 세이암 새겨

- 지리산서 쓴 시 7수 사계절 절경 담아
- 개울 건너 자갈밭에 꽂은 지팡이
- 싹트고 푸조나무 돼 오늘날까지 자리

- 만물의 소생 느껴지는 옥천대 바위
- 그 아래 동굴서 마음으로 둔 바둑
- 한 수 한 수 마치 인생 축소판 같아

무엇에도 걸리지 않으려 했으나 칠불암 길목을 지나려니 발길이 저절로 향했다. 밤의 어둠에 수긍하고 해를 끌어오는 여명이 신이(神異)하더니 반야봉 정수리에서부터 함빡 지혜의 기운이 밀려들어 품에 안으니 몸은 학이 된 듯 가볍고 머릿속은 청정한 기운만 가득하다.
최치원이 호리병 속 별천지라 노래한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신흥마을에서 바라본 화개동천. 세이암에서 귀를 씻고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전해진다.
산문을 벗어난 지 한참인데도 배웅을 우겨 따르던 승(僧)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칠불암 동쪽을 흐르는 범왕천이 화개천과 만나는 곳에 이르자 치원은 길가 바위에 걸터앉아 다리쉼을 한다. “저 골짜기에 영신(靈神), 의신(義神), 신흥(神興)이라는 암자들이 있다지요?” “예.” 승의 다소곳한 대답에 치원은 빙긋 웃음을 짓는다. “부처를 모신다며 ‘신’이라…. 아무래도 귀신은 아닌 듯싶고 신선을 말하는 모양이오” 하고는 바랑에서 철필을 꺼내 앉았던 바위에 ‘三神洞(삼신동)’이라 글을 남긴다. “신선이 되려 하십니까?” 승의 물음에 치원은 또 빙긋 웃는다. “아직 신선을 만난 적이 없어 무엇인지 알지는 못하나 그러자면 먼저 귀부터 씻어야겠소.”

화개천 건너편 산기슭에 큰 바위가 엄숙하니 치원은 그리로 건너가 귀를 물에 씻고 바위에는 또 철필로 ‘세이암(洗耳巖)’이라 새긴다. “허유(許由)의 고사가 생각납니다.” 옛날 서국(중국)에 허유라는 현자(賢者)가 있어 요(堯)임금이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기산(箕山)으로 들어가 은거하였고,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 하니 귀가 더러워졌다며 강물에 귀를 씻었다는 고사를 말한 것이다. 치원은 또 빙긋 웃고는 “승은 속세를 떠났어도 속인을 외면할 수 없을 테니 귀를 씻어봐야 헛일일 거요” 한다. 승은 문득 깨친 듯 합장하고 치원을 향해 크게 허리를 굽힌다.

■푸조나무로 천년을 기약하니

최치원의 지팡이가 싹을 틔워 천년을 지켰다는 푸조나무는 오늘도 잎이 무성하다. 하동군 제공
‘화개동시(花開洞詩)’.

동국의 화개동은 / 항아리 속 별천지라 / 선인이 옥베개를 베니 / 어느새 천년이 되었네 / ‘지리산은둔시(智異山隱遁詩)’라고도 하는 시의 첫 수(首)다. 한 번 베개를 베고 나니 천년이 지났어도 선인(仙人)은 그대로라 노래한 것이니 신선으로 천년을 살아 이 땅과 백성, 나라를 지켜보며 지킬 생각이었으리라.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시는 7수가 더 이어진다. 각 수에는 지리산과 화개동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절경을 누구도 견줄 수 없는 빼어난 문장으로 노래하며 자신의 뜻도 담았다.

제2수에서는 ‘산승은 세월을 잊고 / 나뭇잎으로 봄을 기억하네’ 했으니 흐르는 시간에 연연하지 않는 신선의 마음일 것이다. 제4수에서는 ‘지극한 도는 문자를 여의고 / 원래 눈앞에 있다네’ 했으니 그로써 이미 신선의 경지이다. 제7수에서는 ‘진리를 말할 것 있나 / 강이 맑으니 달그림자 통하고’ 하였다. 굳이 글을 짓고 말하지 않아도 진리의 도는 맑은 자연에 있다는 뜻일 테니 노자와 장자가 엿보인다.

다시 개울을 건넌 치원은 산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문득 끌고 다니던 지팡이를 자갈밭에 꽂는다. “이 지팡이가 싹이 나 자라면 내가 천년 뒤 다시 올 것이니 만약 그렇지 않거든 죽은 줄 알라 하시오” 하고는 산중을 향해 표표히 걸음을 옮긴다. 승은 멀어지는 치원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다 눈길을 드니 멀리 산중 하늘에 한 마리 학이 흰 구름 위에서 춤을 추는 듯 어우러져 날갯짓을 한다. 신선이 집에 드니 학과 구름이 맞이하는 것인가. 승은 탄성을 토하고 또 크게 합장해 허리를 굽혀 읍(揖)하고 보니 치원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다.

지금 하동 화개면 범양리 입구 도로변에는 그때 최치원이 꽂은 지팡이가 싹을 틔워 자랐다는 푸조나무(개팽나무라고도 한다)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화개동천 자연 암반에 새겨진 세이암(洗耳巖) 글씨. 최치원의 친필로 알려진다. 하동군 제공
■옥천대 바위 아래, 신선의 터

구름이 길잡이를 한 것인가, 학이 날개를 펼쳐 태워온 것인가. 계곡 위쪽에서는 우렁찬 폭포소리가 속세소리와 담을 쌓아주고, 깊고 좁은 골을 따라 내려오면 용추못 아래에 집채 만한 너럭바위가 숨은 듯 들어앉아있다.

구슬 같은 맑은 물이 지천이니 가히 옥천대(玉泉臺)라 할 만하다. 그 바위 위에 앉으면 사시사철 물소리, 바람소리, 풀잎소리가 햇빛과 어우러지니 그저 고요히 있으면 만물의 소생과 성장, 쇠락, 소멸의 윤회를 느낄 수 있다.

소생의 희열은 흙 속에서 싹을 틔우고 가지에서 순이 돋는 소리부터 들썩이는 기쁨이다. 그 여린 푸름, 세상에 어떤 색과 빛이 그보다 더 아름답고 찬란할까. 모든 생명의 탄생은 그처럼 옥이요 보석이다. 성장의 역동, 그 힘찬 아름다움은 지켜 느끼는 이의 어깨까지 저절로 들썩여 춤추게 한다. 저마다 우뚝 서고 뽐내려는 그 강인함과 뾰족함에 어찌 견제와 충고는 없으랴. 하늘이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면 바람은 거세지고 폭우가 쏟아져 허리를 꺾고 뿌리를 뒤집기도 한다. 구름도 바람도 없이 오직 따가운 빛으로 대지를 달구면 타는 갈증에 허덕이기도 한다. 그래도 대개는 살아남아 꽃을 피우고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을 띤다.

오, 얼마나 위대한가! 살아낸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것은, 꽃을 피운다는 것은. 그러나 때가 되면 성장은 멈춘다. 단풍은 화려하지만 오직 지난 고진(苦盡)의 영광일 뿐 열매는 떨어지니 어찌 허망함이 없으랴. 마침내 소멸 혹은 소생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 메마름, 뼈 시린 차가움, 천 길 동굴 속 같은 짙은 어둠. 그 매몰참에는 일말의 온정도 동정도 없으니 오롯이 견뎌내야 하는 고독일 뿐이다. 그러면 다시 소생…. 그 윤회, 참으로 부질없지 않은가. 석가의 가르침에 모두 고개 숙이는 까닭이리라.

바위 아래에는 눈에 띄는 이만 들 수 있는 동굴이 있다. 작은 방 하나 크기. 또 다른 공간에는 언제부터 누가 들여놓았는지 모르는 진기한 책들이 가지런히 쌓여있다. 그 가운데에 서안(書案) 높이와 크기의 바위 하나. 오직 그 바위 위에만 한 줌 빛이 들어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어느 것도 동굴 밖으로 내가지 말라는 뜻이리라.

치원은 서책을 읽다가 눈이 피로하면 바위 서안 위에 가로 세로 19줄을 마음으로 그어 바둑을 둔다. 한 수는 나의 수, 다음 수는 상대의 수. 선과 선이 교차하는 361개 착점. 그 점에 마음의 돌을 두는 것은 한 해의 하루하루를 소생, 성장, 쇠락, 소멸로 이어가는 삶의 노정이다. 여차 한 수만 잘못 놓으면 지난 전부가 흔들려 마침내 상대의 것이 되니 그대로 인생의 축소판이다. 줄을 긋지 않고 바둑돌을 놓지 않으면 고요하겠지만 생각을 깨우친 존재들이기에 기어이 아귀다툼의 판을 펼쳐 상대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설 깨우침이다. 백성을 위한다는 권력이 백성을 죽이는 것도 그런 생각의 설 깨우침에 기인한다.

바둑 줄을 마음에서 지우고 한가롭게 등을 눕히니 고요하고 평온하다. 얼마나 좋은가, 진정 자유로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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