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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31> 신라인으로 남으리라

‘고운동천’(지리산 계곡)서 개혁의 뜻 가다듬고, 궐성(현 산청) 약재골목서 孝 되새기다

  • 김정현 객원논설위원
  •  |   입력 : 2020-09-06 19:43:56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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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 관아 있는 마을 찾은 치원
- 시장 들어서니 약재 가게 빼곡
- 몸 약한 아내 위한 숙지황 구해

- 무영과 어버이에 관해 논하다
- 그 사랑이 효의 스승임 깨달아

- 동지무렵 바위 밑 찻잎 채취해
- 밤이슬 맞게한 뒤 건조한 동차
- 숙성 오래하면 차 맛 깊어 감탄

법계사를 나온 치원은 올라오며 눈에 익힌 그 길로 산을 내려온다. 중턱에 이르러 길이 넓어지자 옆에는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물이 제법 큰 내(川)를 만들어 힘차게 흐른다. 가파른 지형을 만나면 작은 폭포를 이루고, 물살에 패인 바닥은 소(沼)가 된다. 준험한 산세처럼 물이 흐르는 곳곳에 크고 작은 바위들이 돌출되어 물살을 거칠게 만든다. 거침없는 기세에 소리까지 우렁차니 과연 지리산의 기상 그대로다. 그래도 눈이 아리도록 맑은 물의 내 양편에는 너른 바위들이, 개중에는 마당만 한 크기까지 펼쳐져 있으니 어디라도 앉으면 그대로 신선의 소요(逍遙)터가 될 듯하다.

   
지리산이 품은 고운동천은 빼어난 풍광에 수정처럼 물이 맑아 최치원 선생이 자주 찾아 소요하며 뜻을 가다듬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운동계곡으로도 불린다. 산청군 제공
치원은 피리를 꺼내 불어본다. 벗과 더불어, 아내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짧은 위안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피리의 음색에 본디 그런 면이 있기도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식솔에게 돌아간다 생각하니 곡이 애조(哀調)로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문득 언젠가 지었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동서로 떠도는 몸 갈림길에는 흙먼지 / 홀로 여윈 말 채찍질하며 고생 얼마던가 / 돌아감이 좋은 줄 모르는 바 아니지만 / 돌아간다 한들 집이 가난한 것을.’ 도중작(途中作·길을 가다가).

입신양명, 성공…. 누구나 마음에 품고 모두가 말하지만 무엇이 그것인지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는 듯싶다. 치원 역시 지난날 입신양명의 뜻을 품었고, 오늘에는 모든 직을 버린 허망함으로 이렇듯 산천을 주유하고 있지만 무엇을 하려 했고, 무엇에 이토록 허망한지 스스로 선명하지 않다. 다만 한순간도 일신의 영화를 꿈꾸지는 않았으니 치원의 가난은 물질의 뜻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할지 모르는 그 가난을 말함이다.

관직을 버린 그 마음, 비록 할 수 없음에서 비롯되었지만 외면의 결심인 것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그렇지만 절연은 아니다. 결코 그리할 수 없다, 조국이지 않은가. 서쪽과 북쪽에서 일어난 기운이 거세고, 도선국사의 말씀대로 북쪽에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 웅거하고 있다 할지라도 자신은 끝까지 신라인이어야 한다. 본디 신라에 뜻을 두었고 다만 펼치지 못한 것이니 어찌 군자로서 다른 길에 발을 디디랴. 깊은 소가 휘감아 당겨도 돌아서 나오고, 바위에 부딪히면 돌아 멈추지 않는 저 물결이 가르쳐주지 않는가. 흐름에 올랐으면 그대로 떠가며 할 일을 하라. 비록 이어지는 신라의 천년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천년의 거름은 될 것이니.

치원은 뒷날에도 자주 이 계곡을 소요하며 뜻을 가다듬으니 ‘고운동천’‘고운동계곡’ ‘피리골’ 등의 이름으로 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를 기리게 한다.

■약재를 사며 ‘孝’를 묻다

   
천왕봉 자락을 벗어난 치원은 동북으로 길을 잡는다. 궐성군(현 산청군) 관아가 있는 고을을 살펴보고 해인사로 갈 요량이다. 아늑하게 분지(盆地)를 둘러싼 사방의 산에서는 인간이 삶을 꾸릴 대부분의 것을 내어주는 데다 물까지 풍부하니 아주 옛적부터 터전이 되어 한때는 가야의 소국을 이루기도 했다. 관아에 들를 일은 없어 요기도 할 겸 시장으로 들어서니 다른 산중 고을과 달리 말린 약재를 내놓은 시전이 빼곡하다. 게다가 품종도 한둘이 아니라 약방 절반을 채울 수 있을 만큼 다양하기까지 하다.

“이 모든 게 궐성에서 나는 것들이오?” 치원이 묻자 약전(藥廛)의 주인이 반긴다. “약재는 알아보시고 궐성은 모르셨습니까, 허허. 삼한 땅에서 나는 약제 대부분이 사방 산에서 나는 데다 땅의 기운도 신령하니 효험까지 빼어나 나라 땅의 모든 약재상이 궐성을 찾습니다. 그래, 뭘 드릴까요?”

치원은 잠깐 생각하다 묻는다. “숙지황(熟地黃)도 있소?” “물론입죠. 생지황, 건지황, 숙지황 모두 있습니다.” “직접 법제를 하시오?” “그러문요. 산에서 캔 생지황을 구증구포(九蒸九曝)하지요.”

안해의 몸이 허하니 사물탕(四物湯)으로 보(補)해주려는데 숙지황은 아홉 번 찌고 말려 법제해야 하니 구하기 어려웠다.

국밥을 앞에 놓고 마주 앉은 치원이 들던 술잔을 내려놓고 무영에게 묻는다. “아버님과 연락은 주고받나?” “예, 자주는 아니지만 소식을 듣고 전합니다.” “건강은 괜찮다던가?” “워낙 강골이시기는 하지만 어디가 불편해도 느낄 겨를도 없을 것 같아 걱정이기는 합니다.” “뜻을 둔 곳이 어딘가, 북쪽일 듯싶은데?” 느닷없는 직문(直問)에 무영은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술잔을 비운 치원이 또 묻는다. “자넨 효(孝)를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효. 인간의 가장 원초적 감정이고 이성이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은 품과 젖으로 비롯되니 목숨으로 담보된다. 아버지는 씨앗을 주었으니 역시 목숨이지만 지켜주는 울타리에서는 차이라는 가름의 틈이 있다. 그 틈의 메움은 뜻의 가르침과 지켜줌이다.

아버지는 무영의 반쪽 목숨을 지켜주지 못한 모자람을 무영의 뜻을 지켜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무영에게 새로운 세상을 눈 뜨게 하는 것으로 메우고 있다. 내일의 옳고 그름은 누구도 알지 못하니 다만 선택과 그 선택의 완성에 앞장서는 그 사랑이면 효를 넘어 스승이기도 하다.

무영의 이야기를 들은 치원이 쓸쓸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움이 크고, 너는 어머니에 대해 아픔이 크니 우린 서로의 절반을 위로해줄 수 있겠구나” “이제 가야산으로 길을 잡으십니까?” 치원은 고개를 젓는다. “천령에 들려야겠다. 태수를 했으니 백성들이 알아보면 폐가 될 테고, 견훤의 군사가 수시로 출몰한다니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길을 잡아주었으면 한다.” 무영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한다.
   
겨울에 딴 찻잎으로 만든 동차(冬茶)와 이를 만드는 산청 지리산 자락의 법성사 수산 주지스님.
■‘동차(冬茶)’를 만나다

산청에서 특이한 차를 만났다. 차는 봄날 겨울을 이겨낸 차나무 잎을 따 제다하는데 특히 곡우(穀雨) 전후 여린 첫물 잎을 따 만든 차는 그 은은하고 순한 향이 빼어나 ‘우전차(雨前茶)’라는 이름으로 사랑받는다. 그러니 봄이 지난 뒤의 찻잎으로 차를 만든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산청 지리산 자락에서 동차(冬茶), 즉 겨울에 딴 찻잎으로 만든 ‘겨울차’가 있었다.

대부분 생명체는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야생에 뿌리를 박고 오롯이 맨몸으로 혹한을 견뎌야 하는 차나무 역시 가을에 많은 양분을 준비하고 열성을 품게 된다. 차인(茶人)은 그 점에 주목해 동지(冬至) 무렵 큰 바위 아래 같은 곳에서 완전히 펴지지 않은 잎을 채취한다. 채취한 찻잎은 어떤 인공의 열도 가하지 않고 청명한 날 밤 야생에서 이슬과 서리를 맞게 하고, 낮에는 실내에서 건조하기를 곡우 전까지 반복하여 동차를 만든다. 동차는 밀봉하지 않은 상태로 건조한 실내에 보관하며 숙성할수록 차 맛이 깊어진다. 다른 차와 달리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세월이 만드는 명품이니 아주 귀한 대접을 받을 듯싶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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