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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23> 신라 왕경 소식 갈수록 암울

학문마저 패도의 수단 전락… 허수아비 왕 즉위에 울며 축하글 짓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7-05 19:12:04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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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군 궁예의 기세 날로 커지고
- 귀족들은 자질없는 태자 내세워

- 당의 학문 변질에 조국 왔으나
- 탐욕뿐인 조정 권력에 한탄만

- 여러 압박에 대왕 결국 물러나
- 치원, 서원곡서 상심 달래던 중
- 당에 보낼 양위표 지으란 명령에
- 문장가인 자신을 후회하며 통곡

왕경을 떠나 합포별서(병장)에 머문 지 햇수로 두 해가 지나고 있다. 그 사이 행처를 밝히지 않고 수시로 대문을 나서던 무영이 이번에는 달포 만에 돌아왔다. 항상 그랬듯 다녀왔다고 얼굴을 비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방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는다. “왕경에 다녀왔습니다.” 몇 차례 왕경 소식을 들려준 적이 있었지만 문전에 선 채 짧게 전했기에 들은 풍문이려니 했다.

   
무학산 학봉(고운대) 아래 위치한 서원곡 전경. 지금은 무학산 등산로의 들머리로 널리 애용된다. 여름에는 소(沼)마다 맑은 물이 가득하다. 뒷날 창원의 학인들은 최치원을 그리며 술과 시가 어우러진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겼다 전해온다. 이원준 프리랜서
“무슨 일로?” “대왕(진성여왕)께서 양위하실 듯합니다.” 치원은 두 눈을 질끈 감는데 경천동지할 소리를 내뱉고도 무영은 담담하다. “왕께서는 병세가 깊으시고 북쪽 반군의 기세는 서쪽 반군을 능가해 당장 칭왕(稱王)하더라도 놀랍지 않을 정도입니다.” 궁예의 칭왕이라니. 못내 거슬리지만 이미 5년 전 견훤이 왕을 참칭한 사정이니 굳이 새삼스럽다 할 것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더라도 왕의 양위는 참으로 청천벽력이다. 치원은 한참 만에 마음을 다스려 차분한 음성으로 묻는다. “병세가 어느 정도이시기에?” “병세만이겠습니까. 태자께서도 정무에 별 뜻은 없으신 듯합니다.” 기어코 귀족들이 허수아비 왕을 세우려한다는 뜻이다. 무영이 일어서며 덧붙인다. “왕경으로 거동하시면 위험만 있을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재위 9년이 되던 2년 전(895년) 10월, 큰 오라비인 헌강왕의 서자 요(嶢)를 태자로 삼았다. 요는 헌강왕이 사냥길에서 만난 여인과 야합해 생산했다. 2년 전 왕께서 뒤늦게 요를 불러 골격을 만져보고 형제가 맞는다 하시며 태자로 삼았다.

후손이 없는 대왕이시니 성골로 태자를 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요는 출생의 딱한 사정보다 자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기어이 요를 태자로 삼으려 했고, 그 뜻을 지지하지 않은 치원은 더욱더 귀족들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어이 양위까지. 치원은 절망한다.

■학문 변질 보며 세속 욕망 버렸다

   
무학산 고운대. 학봉으로 불린다. 발아래 합포만의 돝섬과 마창대교가 보인다.
치원은 오늘도 학봉(고운대) 너럭바위에 앉아 눈 아래 펼쳐진 풍광에 하염없는 눈길을 둔다. 하지만 그저 눈길을 두었을 뿐이니 이전 같은 감흥은 없다. 이대로 무학이 펼친 날개를 펄럭여 다른 세상 어딘가로 데려갔으면 싶다.

어찌 세상에 태어나 성공의 욕망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12살 어린 나이에 당으로 유학을 떠날 때 아버지는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라’ 하셨다. 반드시 그 말씀이 아니더라도 유학길에 나선다면 대개는 과거와 성공의 포부를 품게 마련이다. 치원도 과거를 목표로 삼아 6년 만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니 세상이 인정하는 영광이었다. 이어 임명된 관직은 종9품의 율수현 현위. ‘박학굉사(博學宏詞)’ 과거를 치러 합격하면 단번에 더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기에 치원은 사직하고 또 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나 황소의 난이 일어나고 정국이 불안해지자 과거는 시행되지 않았고 생활고는 점점 극심했다. 다행히 회남절도사 고변 휘하에 들어갈 수 있어 도통순관 등의 직을 거치며 ‘격황소서(檄黃巢書)’의 공으로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의 직함과 자금어대까지 하사받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고변의 위상이 흔들리자 앞날은 기약할 수 없게 되었고, 정치의 실상을 깨닫기도 했다.

유가는 인(仁)의 정치로 왕도(王道)를 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책 속에나 있을 뿐 실천할 수 있는 권력의 자리에 오르면 패도(覇道)로 변질된다. 패도란 ‘힘으로 인을 가장하는 것’이니 그 힘을 키우고 지키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그 사람은 명분으로 줄을 서지만 결국은 자신의 욕망에 매달린다. 배우고 익힌 학문은 그렇게 권력에 봉사하는 수단이 되고, 지조를 지키다 몰락하거나 권력의 추세를 따라 줄을 바꾸는 아부가 되니 참으로 허망했다. 하여 세속의 욕망 따위는 조국 신라로 향하며 거두었다. 그러나 당과 달리 신라 왕은 아직 명철했으나 골품제를 등에 업은 조정 권력의 행태는 패도도 아닌 탐욕과 횡포일 따름이었다.

■시마저 지을 수 없는 세상 한탄하다

   
최치원 영정을 모신 창원 두곡서원에선 매년 4월 그를 기리는 향례를 올린다.
학봉에서 동북으로 길을 잡아 내려오면 서원곡을 만난다. 계곡 양편에는 수목이 무성하고 풍부한 유량은 곳곳에 깊고 얕은 소(沼)를 만드니 여름 무더위를 식히기에 더없다. 동행한 서생이 나무그늘 짙은 곳에 자리를 펴니 근처 주막 아낙이 술상을 내온다.

시를 짓지 않은 지 꽤 오래이다. 감흥 기쁨 사랑 그리움 연민 슬픔 분노 절망…. 자연과 인간사의 모든 것이 시가 된다. 그러나 이제는 시를 지을 수 없다. 굳이 무영이 전해주지 않아도 들려오는 풍문만으로도 귀족의 작태와 나라의 앞날은 그저 캄캄한 어둠뿐이다. 그러니 어둠으로 어찌 시를 짓겠는가. 시조차 지어지지 않는 세상에서 그래도 글로 학문을 가르치고 있다. 학문이 패도의 수단이 되지 않을 날을 기다리며, 권력에 빌붙어 아부의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것은 발 담그고 있는 계곡물의 차가움 때문만은 아니리라. 어느덧 6월 한여름의 긴 해마저 서산 너머로 기울어갈 무렵 무영이 바쁜 걸음으로 찾아온다. “여기 계셨습니까? 태수께서 급하게 찾으십니다.” 드문 일이기도 하지만 치원은 까닭 모르게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는다. “무슨 일이라던가?” 매사 머뭇거림 없던 무영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답이 없다. 치원은 입안이 말라 술잔을 들다가 멈춘다. “좋지 않은 소식인가?” 그제야 무영이 고개를 든다. “대왕께서 태자에게 양위하셨다며 표를 지어 올리라는 파발이 왔습니다.” 치원의 손에 들린 잔이 맥없이 소반 위에 떨어져 파르르 떤다.

   
아~ 아~! 벽력 같은 고함과 함께 무릎을 꿇은 치원의 입에서 짐승의 포효 같은 울음이 터져 나오더니 어둠이 깊도록 멈추지 않는다. 내 어찌 글을 익혀 이처럼 참담한 명을 받는가! 내 글로 대왕의 잃어버린 왕좌를 양위라 거짓하며, 그 당위를 당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의 손에 들리게 하는가! 차라리 글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문장이 천박하였더라면….

왕 재위 11년이 되는 897년 6월, 왕은 ‘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이 결정되었노라’ 말하고 태자 요에게 선양했다. 이에 당에 하정사를 보내 올릴 표를 치원에게 짓도록 명하였다.

치원은 울음을 머금은 채 ‘신 아무개는 아룁니다. 오랫동안 병란에 시달린 데다 병마저 앓고 보니’ 하고, ‘신의 조카 요는 바로 신의 오라비인 정(헌강왕)의 아들입니다. 연령은 지학(志學)의 나이(15세)에 가깝고 재기는 종실을 일으킬 만합니다’라고 양위표(讓位表)를 지었다. 고금의 역사를 들어 골격을 잡고 단정한 문장으로 맥을 이었으나 우러난 마음은 찾을 수 없이 건조하였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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