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 연좌제 탓에 평생 감시속 살아
- 직장도 제대로 못간 기억 선명
- 후손에 물려주지 않게 돼 다행”
“형의 헛묘에 무죄 판결문을 들고 가서 70년 맺힌 한을 풀어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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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보도연맹사건 희생자인 아버지와 형의 재심에서 각각 무죄 판결을 받은 박영재(왼쪽) 씨와 정국룡 씨. 박정민 기자 |
지난달 29일 부산에서 6·25전쟁 발발 직후 국방경비법 제32조 이적행위죄로 사형당한 국민보도연맹원 2명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국제신문 지난 1일 자 1면 보도)받았다. 보도연맹원이란 이유만으로 부산형무소에 잡혀가 정식재판도 아닌 군법회의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9월 8일 학살당한 고 박태구(당시 28세) 씨와 고 정동룡(〃 22세) 씨가 70년 만에 회한을 풀었다. 두 사람이 이승만 정부로부터 학살당한 지 70년, 재심 청구로부터 7년, 재심 개시 후 4년 만에 들려온 희소식이었다. 누구보다 이들의 무죄 선고를 반긴 사람은 망자 대신 재심을 청구한 아들 박영재(70) 씨와 동생 정국룡(87) 씨다. 판결 선고일에 부산지법에서 만난 두 사람은 “아직 얼떨떨하다. 실감 나지 않는다”고 했다. 연좌제가 있던 시절 보도연맹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직장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기억이 아직 선명해서다.
정동룡 씨는 1948년 ‘삐라 살포’와 관련해 경찰 조사를 받고 풀려난 뒤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당시 15세 소년으로 부산진구 초읍동에서 형 아버지 누나와 함께 살았던 동생 정국룡 씨는 형이 체포돼 고문받던 장면을 똑똑하게 기억한다. “당시에는 기관요원 행세를 하는 (우익) 청년들이 많았다. 그들이 어느 날 경찰과 함께 형을 북부산경찰서(현 동부경찰서)로 잡아가서 발로 차고, 거꾸로 매달아 고춧가루 물을 들이붓고, 전기고문도 했다. ‘삐라 붙였지’ ‘부모가 시켰지’라며 자백을 유도했지만 형이 하루 만에 풀려난 것으로 봐선 별다른 죄를 짓지 않은 것 같다.” 그 일 이후 파출소 직원이 형에게 찾아와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배급을 주지 않고 직장서도 해고시킨다고 해서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뒤 군 특무대가 영장 없이 정동룡 씨를 연행해 부산형무소에 수감했다. 2년 전 처벌받지 않고 풀려난 그 일이 국방경비법상 이적행위라며, 설립 근거도 분명치 않은 군법회의가 사형을 선고했다. 여름에 잡혀간 형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이 두세 달이 흐르자 동생은 가을옷을 챙겨 형무소로 면회를 갔다. 형은 이미 없었다. 형무소 측에서는 ‘장소이동’ 됐다고만 통보했다. ‘부산형무소에서 트럭에 재소자를 가득 싣고 어디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동생은 택시를 빌려 그 트럭을 따라갔다. 트럭이 멈춘 곳은 청사포 인근 장산 기슭이었다. “아주 가까이는 못 가고 트럭이 멈춘 지점에서 0.5~1㎞ 거리쯤 되는 곳에 내렸는데, 총소리가 ‘탕탕탕’하고 났다. 우리 형도 이렇게 죽었겠구나 싶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형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직장에 다니며 집안 기둥 역할을 하던 형이 실종된 뒤 가세는 기울었고, 아버지는 장남을 그리워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 형은 경남 양산 가족 묘지에 헛묘를 만들어 그동안 제사를 지냈다.
박영재 씨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못 봤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왜 숨졌는지 이유도 모른 채 조부모 손에서 자랐다. 박 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가 조사를 시작하며 사망 경위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어딜 가도 좌익분자 가족이라고 해 고개를 못 들고 살았다. 그 딱지를 후손들은 뗄 수 있다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덧붙였다.
지난 2월 마산 보도연맹원 6명이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검찰은 항소하지 않았다. 이번 부산 사건도 검찰은 항소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과 형사보상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박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