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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18> 치원, 양산서 옛 가야 더듬다

무력 침략 않고 6국 공존한 가야 … 신라 복속 후에도 지명으로 남아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5-31 19:27:24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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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기문화 번성한 여섯 가야국
- 500년간 서로 권력 다툼 않아
- 삼한 중 가장 먼저 멸망했지만
- 백성들 ‘가야진’으로 이름 전승

- 양주 오봉산에 이르렀던 치원
- 임경대 건너 옛 가야 김해 보며
- “군자·신하 제각각의 도리하면
- 백성 삶 여유 생기리라” 깨달아

- 시무십여조 받아들인 진성여왕
- 백성 보살피려는 희망 되살려
- 혼란 깊어지면 귀족 세력도 타격
- 치원, 미래 인재 육성 의지 키워
   
임경대에서 내려다 본 옛 황산강인 낙동강. 굽이치는 강물의 형상이 한반도를 빼닮아 가슴이 확 트이는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국지도 60호선)가 건설 중이다(작은 사진). 길을 만드는 다리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려면 조화를 위한 상상력이 필요할 듯싶다. 양산시 제공
■임경대를 노래하다

‘멧부리 웅굿종굿 강물은 넘실넘실(煙巒簇簇水溶溶) / 집과 산 거울인 듯 서로 마주 비치는데(鏡裏人家對碧峯) / 돛단배 바람 태워 어디로 가버렸나(何處孤帆飽風去) / 나는 새 어느 결에 자취 없이 사라지듯(瞥然飛鳥杳無踪)’. ‘임경대 제영(臨鏡臺 題詠)’ 또는 ‘황산강 임경대’로 전해지는 최치원의 시를 이은상이 번역한 거다.

정처 없는 유랑의 길. 치원의 걸음은 강을 끼고 솟아오른 양주(지금의 양산 일원) 오봉산을 향한다. 중턱을 지나 조금 더 오르자 황산강(낙동강의 옛 이름)이 한 눈에 들어오는 평탄한 땅이 있다. 가파른 절벽 위, 그리 넓지는 않아도 편평한 바위들이 펼쳐져 그대로 대(臺)가 된다. 마침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햇살 반짝이는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먼 곳의 검푸른 산까지 또렷하다. 훗날 한반도 지형이 지도로 모습을 드러낸 뒤 그 모양을 닮았다 하여 오늘날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이름하여 임경대!

강 건너편은 옛 가야의 땅 김해다. 강 양안(兩岸)의 푸른 산과 드문드문 들어선 작은 마을의 집들이 맑은 강물을 거울인양 마주 비치는 광경이 아름답고도 정겹다. 서국(西國·중국)의 대륙이 천변만화라 하지만 이처럼 청정의 풍광은 만나보지 못했으니 우리 동국(東國·신라)이야 말로 신선의 땅이다. 크고 작은 돛을 펼쳐 선선한 바람을 안아 유유히 강물을 가르는 배들과 그 위를 미끄러지듯 활강하는 새들. 저처럼 조용히 머물다가 문득 그리우면 훨훨 길을 나서는 인생이라면, 하지만 아직 그러기에는….

■신라와 가야 잇는 양산

   
낙동강을 면한 오봉산 산자락은 속살의 상처를 드러낸다. 누런 모래더미와 철재 플랜트 설비가 보인다. 레미콘 공장이다. 빼어난 주변 풍광 속 옥에티다. 이곳은 번성한 가야의 밑바탕이 되었던 철광석을 캐던 광산의 흔적이라 전해온다. 어디서 찾아왔던지 이 땅의 남쪽에 터를 잡고 500여 년 왕국을 지킨 사람들. 철을 잘 다뤄 그 덩이쇠로 왜는 물론 서쪽 나라들과도 교역하며 나라의 부를 쌓았으니 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들은 하나 되기를 욕망하지 않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알에서 태어난 수로왕의 여섯 형제들이 변한(弁韓) 12소국을 바탕으로 각각 여섯 가야국을 세웠다. 처음에는 형제이니 우애로 서로를 존중했다 할지라도 다른 삼한(三韓)의 나라들과 북방의 고구려가 서로 각축하니 가운데에 끼인 그들 역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을 터. 그럼에도 형의 나라라 하여 복속하기를 강요치 않았고, 힘이 강하다 하여 무력을 내세우지 않으며 하나 되기를 도모하지 않다가 삼한 중에 가장 먼저 나라의 이름을 잃었다. 어리석음일까. 더듬어보면 소국이었으나 가야 6국 안에서 반란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반란은 권력의 독점과 가렴주구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나라가 작다 하여 없는 일이 아니거늘, 그들 왕의 다스림이 새삼 궁금하다.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애초 가야인을 다스리던 아홉 추장의 호칭이라 전해진다. ‘간(干)’은 북방 유목민족 수장의 호칭 ‘칸’에서 유래한 것이기 십상이다. 흉노·선비 같은 북방의 그들은 씨족의 수장을 칸이라 칭하며 형제나 핏줄임에도 저마다 나라를 세워 협력하다 서로 다투기도 하고, 합치기도 했다가 다시 갈라지기도 해왔다. 그들은 쇠와 말을 잘 다뤄 무력이 강하니 대륙에 혼란이 일면 기다렸다는 듯 쳐내려와 중원 역사에 왕조로 이름을 남겼다. 서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秦)의 조상이 유목민족이었고, 한나라의 혼란 뒤 남북조시대 북조의 5호16국 대부분이 그들이었다. 무력을 앞세우지 않은 가야의 여러 면이 그들과 닮지 않았는가.

■최치원, 정치의 본질을 깨닫다

   
양산 가야진(나루)에서 본 김해 용산. 낙동강 하류에서 강폭이 가장 좁은 이곳은 신라와 가야를 잇는 길목이었다.
유가(儒家)의 시조 공자께서 본으로 삼은 것은 주공 단(周公 旦)이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한 뒤 주공은 종법제와 분봉제로 통치의 근간을 삼았다. 천자(天子)인 왕이 있으나 분봉된 봉국은 저마다의 군주가 다스리며 천자를 옹위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백(百)이 넘는 봉국은 제각각 세력을 키우고자 각축하며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난세에도 공자는 인(仁)의 정치를 말했을 뿐 거대한 하나로의 통일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이 아직 그에 닿지 않아 생각지 못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진이 춘추전국의 혼란을 끝내고 통일을 이뤘다지만 이내 다시 갈라졌고, 한(漢)이 다시 하나를 이루었으나 또 쪼개졌고, 수(隨)와 당(唐)이 수습하였다 하나 이제 또 흔들리고 있으니 거대한 하나에 의미의 전부를 둘 수 없지 않은가.

‘인의 정치’, 법의 강제에 앞서 인간의 양심을 일깨워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고 따르는 정치를 말함이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군자는 군자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얼핏 생각하면 엄격한 차별 같으나 본질은 ‘답게’에 있으니 불가의 평등이 또한 그와 다르지 않으리라. 그처럼 제각각 ‘답게’의 도리를 다하면 다스리는 자는 탐욕스럽지 않게 되고, 그로써 백성의 짐은 가벼워져 삶의 여유가 있게 되니 서로 갈등하지 않고 도둑은 사라지리라. 그러니 굳이 ‘큰 하나’를 이루려 함이 백성에게 무슨 소용이랴. 치원은 문득 이것이 정치의 본질이었나 생각한다.

황산나루(지금의 물금나루 터)에서 북으로 강을 거스르면 이내 가야진(伽倻津)나루를 만난다. 양주와 김해 사이의 강폭이 가장 좁아 예부터 물자의 교류가 왕성하던 곳이다. 법흥왕 19년(532년) 가야가 복속되고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가 금관소경(小京)을 거쳐 김해소경으로 바뀌었으나 백성들은 여전히 가야진이라 부르며 매년 봄이면 인근 가야진사에서 용신제(龍神祭)를 올린다. 사라진 지 300년이 더 된 나라의 이름을 여전히 간직하는 백성들의 마음은 무엇인가.

치원은 무너져가던 마음을 다잡고 의욕을 되찾는다. 여왕의 마음은 자애롭다. 시무십여조를 기꺼이 받아들인 그 마음은 개인의 욕망보다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다. 불가에 깊이 의지하는 그 마음도 백성을 나름의 평등으로 존중하고 보살피려 함이다. 아직 희망의 씨앗은 살아있다. 혼란은 한편으론 희망이다. 혼란이 깊어지면 진골 귀족과 그에 빌붙은 자들의 세력은 흔들리고 약해지리라. 그때가 되면 다시 왕께서 위엄과 권한을 되찾을 테니 백성은 기뻐하고 신라는 다시 천년의 기틀을 닦으리라.

터를 잡자. 민생이 절박하지 않아 아직 인심이 살아있는 곳. 그곳에서 ‘답게’의 인과 덕을 가르치자. 왕께서 힘을 되찾으실 때 보필할 내일의 인재를 기르자. 그곳이 하동이 될지, 천령(옛 함양)이 될지, 남쪽 바닷가 고을 어느 곳이 될지 길을 떠나보자.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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