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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17> 백성이 주인이니 희망이다

황산나루(물금나루)는 문물 교류의 場…개방과 포용이 신라 번영의 원천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5-24 19:59:10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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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북 반란군 스스로 왕이라 하고
- 나라 곳곳에 불온한 기운 가득
- 바다 인접 양산 낙동강 일대는
- 역마·시장 등 번성해 안정 유지
- 권력 탐욕에 신라 결국 쇠락의 길

- 황산시장 특산 웅어회 맛본 치원
- 나라 사라져도 시장은 이어지니
- 토착 민초들에게서 희망 느껴

   
영남의 젖줄 낙동강(옛 황산강)은 신라시대에도 이곳을 통해 수많은 백성과 다양한 물산이 드나들어 민초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다. 사진 우측은 양산 황산공원이다. 번성했던 물금나루(옛 황산나루) 옛터에는 지금은 물금취수장이 들어서 있다. 양산시 제공
■천년 신라 근원은 개방과 포용

황산역마(黃山驛馬), 뒷날의 역참(驛站)이다. 공무로 왕경과 지방을 드나드는 관리들이 지친 말을 바꿔 타고 숙식을 해결하며, 문서를 발송하고 전달받기도 하는 일종의 통신처이다. 인근에는 황산나루(물금나루)가 있다. 내륙 깊은 곳에서부터 굽이굽이 흘러온 황산강(낙동강의 옛 이름)이 바다와 만나는 하류에 위치해 양주(良州·현 양산시 일원의 신라시대 지명)에서 가장 번성하는 포구다. 본디 육로보다는 수로가 배로 한 번에 많은 양의 화물을 운송할 수 있는 데다 나라가 혼란할수록 들끓는 도적떼로부터의 안전을 확보하는데 유리해 요즘에는 더욱 북적거린다.

서쪽과 북쪽의 반란군이 참담하게도 왕을 참칭하고, 나라 곳곳에 불온한 기운이 가득하지만 양주를 비롯한 남쪽은 그나마 격하지 않은 것은 민생이 그럭저럭 견딜 만하기 때문이다.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지만 그것은 결국 안전과 안정, 희망을 말함이 아닐 텐가. 드나드는 물산이 많으니 무엇을 하든 배는 곯지 않고, 이대로 시장의 번성이 유지되기만 한다면 한 푼씩이라도 모아 조금이라도 나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으니 굳이 불온한 기운에 흔들릴 까닭이 없는 것이다.

신라는 오랫동안 황금의 나라로 불렸다. 서역 먼 곳에서까지 수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이에 온갖 물산이 드나드니 그 거래에서 백성의 삶은 윤택해지고 나라의 곳간까지 그득해졌으니 그게 곧 황금의 나라였던 것이다. 가장 변방의 신라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밑바탕도 그것이었을 테니 나라의 문을 열고, 차별하지 않고 포용하는 힘은 얼마나 대단한가. 한(漢)과 당나라 또한 그렇지 않았던가. 개국 초기 그들은 서역은 물론 오랑캐라 멸시하던 북방에까지 문을 활짝 여니 온갖 낯설고 기이한 문물이 물밀 듯 들어와 더 나은 새로운 것으로 이어지며 만방을 압도할 국세로 명실상부한 황제의 국가, 제국(帝國)으로 당당하지 않았던가.

■황금을 빚어내는 시장

   
역마를 나서 포구를 거쳐 황산시장(물금시장)으로 들어서니 북적거리는 활기 속에 당에서의 지난 일이 떠오른다. 장안(長安·지금의 서안)은 대로 뒷골목의 시장까지 얼마나 활력이 넘쳤던가. 누린 양고기 냄새에 서역에서 들어온 코를 찌르는 온갖 향신료의 맵고 따끔거리는 향. 그래도 뿌옇게 피어오르는 연기속의 꼬치(串) 굽는 냄새는 어찌나 입맛을 다시게 하던지. 여인들까지 호복(胡服·오랑캐 복색) 바지 차림에 속살이 보일 듯 짧고 얇은 저고리를 입고 거리낌 없이 활보하며 쾌활했으니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내 틀림이 아니라 다름임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런 다름을 배척하지 않고, 더하여 여러 나라 인재를 불러들여 학업을 지원하고 과거를 거쳐 관리로 등용하기까지 하니 세상의 주인, 중심이라는 호언에도 반박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대단한 당나라도 이제 저물고 있다. 꽃이 피었다가 지듯 성하여 쇠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문제였다. 크면 클수록 놓을 수 없으니 스스로를 옥죄어 눈과 귀가 멀어지며 오직 탐욕이 되는 권력. 끝내 불신하고 의심하니 드나들던 걸음은 멀어지는데 오히려 철옹성까지 쌓는다. 그래서 지켜질까. 문을 닫아 쇠해지니 채우지 못하는 탐욕들이 창검을 들고 말머리를 돌리는데….

‘나라, 國’ 소멸되지 않고 버티어 남는 것이 목적이고 이유 아닌가. 다만 작아서 생존을 위해 머리를 숙였으나 천년을 지켜오다니, 얼마나 위대한가. 그런데 그 천년의 질긴 생명이 가물거리고 ‘황금의 나라’ 영화가 빛을 잃어가고 있다. 시작은 어디였을까. 권력은 언제나 그래왔으니 왕권의 다툼만은 아니다. 더듬어보면 청해진 장보고와 함께 천년의 활력이 사그라지고 있는 것도 같다. 시장,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나라는 사라져도 시장은 남을 테고, 시장이 살아있으면 나라는 어느새 또 들어설 테니.

■봄철 특산 웅어회에 술잔 기울이다

   
진상품 웅어회를 하는 집이 물금읍에는 한 집 남아있다. 4, 5월이 제철이다.
“고운 선생님!” 느닷없는 외침에 치원은 고개를 돌린다. “맞으시죠?” 처음 보는 얼굴인데 관복 차림의 사내는 찾아 헤매기라도 한 듯 바쁘게 다가선다. “처음 뵙습니다. 역마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아찬님께서 오셨다기에 포구며 시장이며 한참을 찾았습니다.”

관복이 덥석 두 손을 잡자 치원은 “관직은 모두 내려놓았소. 아찬은 당치 않소이다”며 그의 손을 밀어낸다. 관복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하하하! 옳으십니다, 그깢 벼슬이 고운 선생님 명성만 하겠습니까. 그래도 대왕께서 가납하지 않으셨다니 저 같은 말직이야 당연히 그리 모셔야지요.” 치원은 손사래 친다. “포구 여각에서 하룻밤 묵고 떠날 것이오. 공무가 아니라 그저 나선 걸음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예,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아찬님이면 감히 저 따위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고운 선생님이시니 제가 오늘 대접을 하겠습니다. 가시죠.” 관복은 또 덥석 치원의 한 손을 잡아끌며 앞장선다.

강 가까운 시장 주막이다. 남편은 황산강에서 어로를 하고 안해는 잡아온 고기로 음식을 만들어 파는 듯하다. “오늘 웅어 좀 잡았던가?” 마당으로 들어서며 묻는 관복의 소리에 부엌에서 뛰쳐나온 아낙이 허리를 굽힌다. “어서 오세요, 나리. 오늘은 제법 잡혔습니다.” “역시! 귀한 분이 오시니 그놈들도 알아서 그물로 뛰어들었나보군. 우선 술부터 내오고, 그놈들 전부 손질해 올리게.” 관복의 호탕함에 치원은 문득 해운포의 만호를 떠올린다.

민물에서 태어난 웅어는 바다로 나가 살다가 봄철에 되돌아와 산란한다. 갈대 사이에서 산란하는 습성이 있어 ‘갈대 위(葦)’ 자를 붙여 ‘위어’라고도 부른다. 남해보다는 서해 연안에서 더 흔하지만 봄철 한 달 남짓 잡을 수 있는 데다 그 양도 많지 않아 뒷날에는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한 ‘위어소(葦魚所)’를 설치했을 정도로 귀한 어종이다.

비늘을 벗기고 날로 썰어낸 웅어는 비린 맛이라고는 없이 고소하다. 관복은 잔이 비면 술을 채워주며 절인 곤달비에 웅어를 싸서 권하기도 하고 산초 잎으로 향을 더해주기도 한다. “때를 잘 맞추셔서 이렇게 웅어를 대접할 수 있으니 참으로 기쁩니다. 여기 양주는 바다 가깝고, 큰 강에 산까지 깊은 데다 교역으로 여러 물산이 다양하지만 사실 나라 어딜 가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놈 웅어는 잠깐이지만 특별하고 귀하니 자랑으로 여깁니다, 허허.”

치원은 하급관리이기 전에 토착 민초인 그에게서 희망을 본다. 시장의 흐름으로 나라 안 물산의 사정을 짐작하고, 계절의 특산물로 지역을 내세우고 있지 않는가. 한 계절이 지나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 테고, 그렇게 한 해를 지키면 다시 순환이 이어질 것이니 나라는 망해도 시장은 남지 않겠는가. 아, 과연 누가 나라의 주인인가! 안타까움의 탄식 같지만 그것이 참된 희망이라는 생각에 치원은 점점 더해지는 취기에도 마음을 놓는다.

영락은 서글프지만 시대의 흐름에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황산에서 물금으로 이름을 이어온 양산의 시장도 그렇다. 그래도 특산 먹거리를 찾다가 웅어 식당을 만났다. 옛 물금시장 그 터이다. 둘러보니 주변에 청년의 새바람이 불어 ‘서리단길’이 조성되고 있다. 희망이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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