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신문은 1980년 5월 23일 4명으로 구성한 임시 취재반(사회 2부 김양우·사회 1부 엄철민·사진부 김탁돈·사회2부 강용범)을 광주로 급파했다. 이들은 27일 계엄군이 재진입했던 이른바 ‘충정작전’까지 취재를 마치고 28일 귀사했다. 이들이 쓴 방담기는 같은 해 6월 15일 국제신문 자매지인 ‘주간국제’ 5면에 실렸고, 당시 편집국장과 기자들은 계엄사 부산분소로 불려가 고초를 겪었다. 40년이 지나 디지털뉴스부는 당시 기사를 발췌해 80년 5월 광주의 장면들을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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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이러면 시민에게 …”
도청 바로 옆의 광산 등에 산다는 한 시민은 이날 새벽 4시께 총성 속에서 쫓기는 듯한 무장시위대원(시민군)이 대문을 두드리며 ‘물 좀 달라’고 했으나 겁이 나 가만히 방 안에 있자, 또 다른 음성이 ‘우리가 이러면 시민에게 피해를 주게 되니 그냥 가자’면서 함께 사라져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 “기자냐? 취재해서 신문에 꼭 좀”
어느 기자는 문공부가 발행한 프레스카드를 무장시위대들이 가장 잘 알아주더라면서 “기자냐? 취재해서 신문에 꼭 좀 내달라”고 취재 편의를 제공했다고 (계엄군에)투덜투덜. 그런데 계엄당국에선 26일 하오(오후) 6시까지 외신기자 철수령을 내렸는데 이때 국내기자들에겐 알리지 않았던 게 27일 밝혀져 어느 국내기자는 “국내 기자들은 죽어도 된단 말이냐”고 분개하기도.
■ KBS 기자들을 원망하기도
게다가 26일엔 무장시위대가 25일 밤 KBS-TV 뉴스 때 그들(시민군)의 얼굴이 선명하게 화면에 나왔다고 살기등등해지면서 KBS 기자들을 원망하기도. 이들은 기자들에게 얼굴을 찍지 말라고 당부했는데도 이를 어겼다면서 다른 기자들마저 위협을 느끼게 했던 것.
■ 송고, 월남전 때보다 어려워
외신기자들은 이번 광주사태에서 월남전 때보다 더 송고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광주를 비롯, 전남 전체가 통신이 제 기능을 발휘 못한데다 특히 부산과 통하려면 전북 또는 경남까지 나가야 시외전화가 가능해 본사취재반은 24일 아침 송고할 땐 전북 남원까지 차로 왕복 3시간 걸렸던 것. 그렇지만 취재 송고를 어렵게 하고서도 결과는 다른 신문 방송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기사만 나가고 말아 취재반들은 큰 비애를 느껴 며칠간 계속 분개하기도.
■ ‘44번’은 동양적 사고방식
이들은 차마다 번호와 용도를 알리는 글을 주로 뻘건(빨간) 페인트로 표시해 일견 정리감을 주는 한편 뻘건색 바람에 처음 보는 사람에겐 간이 섬뜩하게 만들기도. 그러나 번호가 붙어있는 차량은 학생들의 통제 아래 움직여 시위대 중에서도 가장 질서가 잡혀 있었다고 한다. 시체 운반차의 경우 ‘44’번 번호를 붙였는데 아마도 ‘4’는 전통적으로 죽음을 의마한다는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연유된 듯.
원문 : 1980.6.15. <주간국제> 5면 「최악의 민족비극 … 다시는 없어야」 김양우·엄철민·김탁돈·강용범 기자
신동욱 기자·김재헌 인턴기자·구은지 인턴기자 woogy0213@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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