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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16> 통도사 방장스님께 평등 묻다

귀족들 개혁 반발에 쫓기듯 유랑길… 통도사서 평등의 깨우침 얻었나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5-17 19:39:29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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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 쇄신 등 담긴 시무십여조
- 왕 기뻐하며 아찬 직 내렸지만
- 권력 탐하는 귀족·두품들 반대
- 왕경서조차 모두 악귀 보듯 해

- 각지 뜻있는 이들과 교유하고자
- 도피하듯 나선 유랑의 발걸음

- 치원, 통도사와 인연 기록 없지만
- 큰스님과 나누었을 문답 상상

- “봄빛은 높고 낮음에 가림 없는데
- 가지는 저절로 길거나 짧습니다”
- 다름이 곧 평등이라 답한 큰스님
- 치원, 부처의 이치 깨닫고 떠나

■좌절된 시무십여조 개혁의 꿈

길이 막혔다. 왕(진성여왕)께서 등극하신 지 8년(894년), 견훤과 궁예의 무리가 점점 거세지고, 지방 도처에서 반란이 일고 있었지만 아직 천년 왕국의 불씨는 남아있었다. 살아온 37년 공력을 다해 시무십여조를 왕께 올린 것도 그 불씨에 기대해서였다. 과연 왕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아찬(阿粲)의 직까지 내리셨다. 진골이 아니면 6두품만이 오를 수 있는, 두품 신분으로는 최고의 직이다. 비록 중앙부서의 장(長)은 될 수 없어도 바로 아래 직에 보임될 수는 있으니 실무를 총괄할 수 있었다.
   
천축국(인도)의 영축산을 닮았다는 영남알프스의 최남단 영축산이 품은 양산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이다. 옛 가야의 땅에 들어선 통도사는 나라 잃은 이들의 그리움에 큰 위안이 되었으리라. 양산시 제공
그러나 쇄신의 개혁에 진골은 일제히 거세게 반발했다. 왕께서는 모처럼 희망을 품고 뜻을 세웠으나 여왕으로 기반이 약하시니 결국 기치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으셨다. 그로써 치원은 귀족은 물론 권력과 이익을 탐하는 다른 두품들에게조차 눈총을 받고 적으로까지 여겨졌다.

사직의 뜻을 밝혔으나 왕께서는 가납하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왕궁은커녕 왕경에서조차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모두가 역병을 보듯, 악귀를 보듯 등을 돌리고 침을 뱉으니 어찌 머물 수나 있겠는가. 유랑 아닌 도피의 길. 그래도 유랑이라 자위하며 민심을 듣고 뜻있는 이들과 교유해볼 요량이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모두가 존귀하니

   
통도사는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가 당에서 가져온 불사리와 가사(袈裟), 대장경 400여 함(函)을 봉안하고 창건한 사찰이다. 절을 품은 산 또한 석가의 나라 천축국(天竺國·인도)의 영축산과 닮았다 하여 축서산(鷲棲山)에서 영축산(靈鷲山)으로 이름을 바꿨으니 왕경의 불국사를 비롯한 온 나라의 수많은 사찰 가운데서도 가히 으뜸이라 할 만했다.

통도사 큰스님께서는 어찌 치원의 걸음이 영축산에 닿았음을 알았는지 시자를 보내셨다. 쫓기듯 나선 유랑의 길임을 알 만한 이는 모두 아는 데도 큰스님은 석가인 양, 무심한 듯 너그러운 듯 알 수 없는 낯빛으로 맞아준다. “난처한 처지의 사람입니다. 드나드는 이들도 많은데 어찌 저를 찾으신 겁니까?” 치원은 스님이 괜한 눈총이라도 받게 될까 염려하지만 큰스님은 등을 돌려 앞장선다.

“그러니까요. 뭇 사람들이 드나들고 산문에 들면 왕도 비천한 이도, 설령 역적이라 해도 오직 중생일 뿐입니다. 중이 중생을 만나 차 한 잔 나누는 것이 무에 그리 대수라고요, 허허허.”

   
통도사 방장 성파큰스님과 필자인 김정현 작가.  
큰스님 뒤를 따라 암자 선방에 드니 시자가 차와 다식을 내온다. 치원이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기를 기다린 큰스님이 빙그레 웃음 짓는다. “어딜 가나 부처님은 귀가 크시죠. 왜 그렇겠습니까? 뭇 중생의 모든 소리를 들으시겠다는 뜻이겠지요. 소승이야 달랑 두 개의 작은 귀뿐입니다만 부처님 귀는 어디에도 있을 테니 답답하시면 넋두리라도 하십시오. 그럼 좀 위안이라도 되지 않겠습니까.”

석가가, 부처가, 보살이 나서 중생을 구제하는 세상이 있을까. 아무래도 현세에서는 찾거나 만나지 못할 듯싶다. 바라지도 않는다. 석가는 그저 가르침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생명이 없다 여기는 것조차도 모두 평등하고 존귀하며 불성이 있다 하지 않는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석가께서 태어나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외쳤다는 ‘하늘 위와 아래에서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는 그 말씀은 당신 혼자가 아니라 우주 모든 생명이 저마다 존귀하다는 뜻임에도 살며 어디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으니…. 치원의 서글픔은 바닥이 없는데 큰스님은 듣는 듯 듣지 못하는 듯 그저 묵묵부답이다. 그 답 없음에 치원이 말문을 닫자 스님은 앞장서 방을 나선다. “먼 길에 고단한 듯 보입니다. 절간 공양은 내일 아침에 하시고 저녁은 산문 밖에서 하십시다. 봄철 산나물은 모두 보약이고 주막마다 산채 음식이 풍성하니 몸과 마음의 기운을 돋을 수 있을 겁니다.”

■춘색무고하 화지자장단

   
통도사 산문 앞 산채정식. 사시사철 풍성한 산채정식은 그대로 보약이다.  
영축산 청정한 기운 속에 눈을 뜨고 절집 스님네의 공양으로 아침 속을 채우니 마음보다 몸이 더 개운하다. 다시 길을 떠나려 큰스님을 찾아 배(拜)를 올리니 또 앞장선 걸음이 아직 지지 않은 매화나무 앞에서 멈춘다.

“춘색무고하(春色無高下)하고 화지자장단(花枝自長短)입니다.” ‘봄빛은 높으나 낮으나 가림이 없는데 꽃가지는 저절로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는 뜻이니 어제 넋두리한 평등에 대한 답이다. 하늘빛은 고하가 없음에도 가지의 길이가 제각기 다른 것은 차별이 아니라 그 나름의 평등이다. 수직적 수평적 기준의 평등은 세속의 잣대, 불가에서는 다름의 도를 넘지 않는 것도 평등이라 하니 결국 성불의 평등으로 위안해야 하나, 치원은 안타깝다. “중용도 그 자체의 중용 아닐까 싶습니다.” 큰스님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휘적휘적 걸음을 빨리한다.

장엄한 통도사 가람에 봄볕이 드니 긴 겨울잠에서 깬 듯 생동하는 기운이 느껴져 희망인가 싶기도 하다. 일주문으로 향하는 개울가 길은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로도 불린다. 어찌 산중에 바람이 없을까만 고즈넉한 소나무 숲길에 여러 새소리 가득하니 바람이 분다 한들 물소리와 어우러지면 노래가 되고 솔가지의 흔들림은 춤이 될 터, 생각을 내려두기에 맞춤하지 않은가. 비우고 내려놓음도 불가의 가르침, 어차피 산문 밖을 나서면 또 채워지고 들게 될 일이니 잠시 번뇌에서 벗어나 본다.

   
통도사 무풍한송로.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면 잠시 근심을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
얼마나 걸었을까. 저쯤에 일주문이 보이자 큰스님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다. “소승은 여기까지 배웅하겠습니다. 기왕 나선 걸음이시니 남쪽 바닷가를 휘돌아 보십시오. 인심이 야박하지 않으니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혹 가야불교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가야불교라니, 치원은 처음 듣는 이야기다. “걸음이 하동에 닿으시면 반야봉 남쪽에 가락국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창건했다는 칠불사가 있으니 한 번 찾아보십시오. 남쪽은 여전히 가야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가야라는 이름도 부다가야에서 유래했고, 천축국에 양주(良州·9주 5소경 중 하나로 지금의 양산시 일원)와 강주(康州·진주 등 서부경남 일원)를 합한 크기(지금의 경남 크기)의 가야라는 지역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허왕후와 함께 불법이 전해졌다는데… 허허.” 치원이 묻는다. “통도사는 자장율사께서 창건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요. 그렇지만 당을 통해서든 천축에서 직접 전해졌든 불법이 무에 다르겠습니까. 다만 여기 양주도 가야의 영향이 컸으니 그 인연도 안는 것이 절집의 도리지요, 허허.” 큰스님은 그렇게 선문(禪問) 같은 말씀을 끝으로 두 손을 모아 합장한다. 치원도 합장하여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일주문으로 향한다. 큰스님은 치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그 자리를 지켰다.

통도사에도 최치원과 인연의 기록은 없다. 그래서 그의 행적에 무심하거나 부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리가! 과연 통도사 방장(方丈) 성파큰스님도 인연이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기록의 부재를 스토리로 메워본다. 최치원이 품었을 의문과 안타까움은 오늘도 다르지 않으니 큰스님과의 문답으로 어두운 눈을 밝혀줄 무언가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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