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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10> 속계·법계 가르는 쌍계석문

절 입구 두 바위에 새긴 ‘쌍계’‘석문’… 마치 속계·법계 가르듯 굳세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4-05 19:46:45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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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강왕 승하 후 즉위한 정강왕
- 절 좌우 계곡 만난다는 뜻 담아
- 하동 옥천사를 ‘쌍계사’라 바꿔
- 치원에 진감선사 비명 완성 명해

- 일주문인양 우뚝 마주한 두 바위
- 쇠막대로 칼로 베듯 이름 새기니
- 훗날 선비들 “용 승천하듯” 찬사

- 세로 7자 남짓한 종이 펼친 치원
- 깨달음 중요시한 선사 떠올리니
- 마치 벗이 된 듯 그 이치 읽혀
- 그 의미 담겠다고 마음 다잡아

   
일주문을 대신해 속계와 법계를 가르는 돌문 역할을 하는 쌍계사 입구의 ‘쌍계 석문’. 서예를 연구하는 학자 중 최치원이 쓴 ‘쌍계’ ‘석문’은 붓이 아니라 쇠막대로 썼을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옛날부터 ‘철장서(鐵杖書)’로 전해지기도 한다. 하동군 제공
■정강왕, 선왕 유지를 다시 명하다

재위 12년이 되는 886년 6월, 대왕께서 병으로 편치 못하니 전국의 죄수를 석방하고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었다. 그러나 7월 5일 끝내 승하하시니 시호를 ‘헌강(憲康)’으로 하였다. 경문왕의 둘째아들로 헌강왕의 동생인 황(晃)이 재위를 이으니 정강왕(定康王)이다.

치원이 등극한 대왕을 알현하자 하문하신다. “선왕께서 옥천사에 진감선사의 대공탑비를 세우라하셨다지?” 이에 치원은 “예”라고 답한 후 인근 고성군에 문무왕조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옥천사가 있어 사람들의 혼동이 있다고 고하자 대왕께서 또 하문하신다.

“그렇다면 마땅히 새 이름을 지어야 할 일이다. 배후에 새 이름의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있더냐?” 이에 치원은 “절 좌우로 두 개의 계곡물이 흐르다 절 입구에서 만나며, 그곳에는 큰 바위가 마주보고 있습니다”라고 복명하니 “기이한 일이다. 그럼 이름을 ‘쌍계’로 하고 바위에 그 이름을 각자(刻字)하라”고 명하신다.

감읍하며 치원은 선왕의 명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불민함을 고하니 대왕께서 고개를 내저으신다.

“선사께서는 행적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너는 문장으로 벼슬길에 나섰으니 마땅히 비명을 짓도록 하라”고 명하신다. 치원은 두 손을 마주잡고 절하며 “네(唯), 네(唯)” 하고 물러났다.

■칼과 창이 교차하는 듯, 용과 이무기가 뒤엉켜 승천하는 듯

   
왕희지와 인연 있는 저장성 소흥의 ‘난정(蘭亭)’에 재현된 당나라 때 종이 대신 물로 돌에 글자를 연습하던 유적.
다시 옥천사 길목의 커다란 두 바위와 마주 선다. 법계와 속계를 가르는 위엄이야 이미 첫 만남에서 무겁게 실감한 바이지만 막상 왕명을 받들어 글을 새겨야 하니 새롭다. 치원은 마치 두 바위와 말이라도 나누는 듯 우뚝 버티고 서 한동안 미동도 없다.

마음속으로 ‘쌍계’와 ‘석문’을 두 바위에 나누자고 결정하니 글자의 위치와 크기가 잡혔다. 각각의 바위 아래위와 좌우를 삼등분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려쓰면 양쪽 바위에 조화로울 듯싶다. 그리 정하자 이번에는 글자의 크기가 쉽지 않다. 우뚝 버티고 선 저 거친 바위 면에 어떻게 하면 큰 글자의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문득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치원은 말 등에 얹어둔 꾸러미에서 무엇인가를 꺼낸다. 팔뚝 길이의 쇠꼬챙이다.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하던 어린 시절 종이는 아주 비싸고 귀했다. 이에 아버지께서 문자를 익히고 필체를 숙련하려면 쉼 없이 쓰고 또 쓰는 길뿐이라며 마련해준 것이었다. 치원은 한 팔 길이의 쇠꼬챙이가 절반이나 닳도록 길바닥이며 돌이며 가리지 않고 쓰며 익혔던 것이다.

이제는 서체(書體)였다. 아득한 옛날 동이족 상(商)나라의 갑골문으로 시작된 글자는 금문(金文)과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를 거쳐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로 발전해왔다. 웅혼하기로는 전서를 꼽을 수 있지만 작금 당에서는 해서가 성행하고 치원도 그에 익숙하다. 서성(書聖)으로 추앙받는 왕희지의 행서를 취할까도 싶지만 바위에 철필을 쓰는 만큼 행서와 해서의 조화와 변화를 적절히 구사하리라 정했다.

철필의 끝을 고른 뒤 시종이 마련한 받침목 위에 올라서 크게 한 번 심호흡으로 단전의 힘을 모아 첫 글자 ‘雙(쌍)’의 첫 획(丿)을 힘차게 그었다. 단칼로 빗겨 벤 듯 어떤 흔들림도 없이 반듯하다. 흡족하니 망설이지 않고 다음 획과 획을 이어 ‘쌍계(雙磎)’ 두 글자를 완성한다.

받침목에서 내려와 두 걸음 뒤로 물러서 한 눈으로 훑어보니 ‘雙’ 자는 우애롭고 ‘磎’ 자는 물이 흐르는 듯하여 부족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새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지만 내처 오른쪽 바위 앞으로 자리를 옮겨 ‘석문(石門)’ 두 글자를 마저 완성한다. ‘石’ 자는 바위처럼 굳건하고 ‘門’ 자는 당당하게 열려있다. 비로소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팔소매로 훔치며 마음을 놓는다.

뒷날 조선조의 한 선비가 ‘쌍계’ ‘석문’ 네 글자를 보고 ‘아동이 습자한 것 같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얼마 뒤 다른 선비가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 사뭇 다르니 참으로 기이하다. 아동의 수준이라 평한 이는 글은 잘 지어도 글씨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고 비판했다. ‘칼과 창이 교차한 듯하다’ ‘네 글자가 엄정하고 용과 이무기가 뒤엉켜 승천하는 듯하다’ ‘기이하고 예스럽다’는 평이 이어졌으니 우물 안 개구리가 제 식견만으로 섣불리 평했다가 호된 돌매를 맞은 격이리라.

■민중의 희망 된 진감선사의 선종

   
더는 짓눌리지 않으리라. 살다 갔고, 살아가는 시대는 각각 달라도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같은 마음으로 생각한다면 죽어서도 살아서도 벗이 될 수 있을지니. 치원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머금는다. 과연! 햇차라더니 향은 아이의 첫 미소처럼 싱그럽고 입안에 번지는 느낌은 달고 산뜻하다.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운에 가만히 목 안으로 삼키니 마음은 가라앉지도 들뜨지도 않는 차분함으로 단단하다. 이제 선사를 벗으로 여겨 그의 머릿속과 마음을 읽으리라.

불가에서 선(禪)이란 무엇인가. 참선을 통한 내적 관찰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품이 부처의 성품임을 깨달으면 곧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즉 문자에 의지하지 않으며, 교외별전(敎外別傳) 즉 교 밖에 따로 전한다는 것이니 화엄경(華嚴經)을 주요 경전으로 삼는 화엄종 같은 교종(敎宗)과는 그 방편을 달리한다. 불가에 몸을 던진 승려에게 그러한 구분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문자에 어둡고 삶이 무거운 민중들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희망이 되어 크게 선풍이 일었다.

불교는 한반도에 전래되어 포교하는 과정에서 왕실이나 귀족과 결탁하게 되었고, 지배층의 통치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이어 의상, 원효 등의 대사들이 화엄의 교종을 크게 일으키니 문자에 밝고 보시할 재물이 풍성한 왕실과 귀족들은 죽어서 부처가 될 수 있었고, 민중은 부처의 은덕으로 고통 없는 세상과 복을 빌게 되었다. 그런데 선종은 똥 묻은 막대기도 부처이고, 깨치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희망이 되겠는가. 그러한 선종은 뒷날 지방 호족들이 저마다 부처가 되고, 새 세상을 꿈꾸며 일으킨 반란의 빌미가 되었지만 진감선사 본래의 뜻은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선은 당시로서는 개혁의 신지식이었다. 또한 유·불·도가 회통하는 사상이 당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신라에서는 통치이념으로서의 유가도 제 역할을 못하였고, 불가나 도가의 인간중심 사상 역시 지배층의 왜곡으로 그 본래의 뜻과 빛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도(道)와 인(人)의 보편적 진리로 선사의 위대한 뜻과 행적을 짓겠다고 마음잡으니 비로소 비명의 화두가 정해졌다.

치원은 시종에게 먹을 갈게 하고 종이를 펼치니 가로는 석 자 남짓(100㎝)이고, 세로는 7자 남짓(202㎝)이다.

김정현·소설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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