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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7> 축복의 땅, 하동

산천 먹거리 풍부해 인심도 넉넉, 나라 온 땅이 이 같으면 좋으련만…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3-15 19:51:11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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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서 16년 만에 돌아온 조국
- 발길 닿는 곳마다 꽃 만발하고
- 관리도 나라 흥성책 기대 가득
- 치원, 어깨 무겁지만 가슴 벅차

- 신라 문필기관의 부책임자로서
- 옥천사 비명 지으려 하동 방문
- 산나물 풍성해 굶는 백성 없고
- 특산품인 벚굴 맛도 좋아 감탄

- 백성들 먹고 살것이 안정되어야
- 그 속에 민심이 있게됨을 되새겨

   
하동의 봄은 온 천지가 벚꽃이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십리벚꽃길은 하동 벚꽃의 절정이다. 16년을 당에서 보낸 후 귀국한 최치원에게 벚꽃 핀 하동 땅은 축복의 땅으로 간주되었으리라. 하동군 제공
■아름다워라, 조국 ‘동국’

왕경(경주)을 출발해 김해, 강주(진주)를 거쳐 하동에 이르는 내내 고국산천에 대한 감동이 사무쳤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당으로 떠나기 전까지 왕경이 전부였고 그것마저 희미한 기억으로 남았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공부라는 무거운 짐에 짓눌린 채 당에 도착한 뒤로 16년을 그 땅에 머물렀으니 살아있는 기억의 대부분은 그곳이었다. 더구나 배워 깨우치는 기쁨에, 스스로도 놀랄 성과까지 거두니 광대한 땅과 천변만화하는 자연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귀국 후 왕명을 받아 처음 돌아보는 고국 남쪽의 산천은 그야말로 금수강산 아닌가! 하늘이며 땅에는 온통 청정한 기운이 넘치고 발길 닿는 곳마다 맑은 물이 지천이어서 마음까지 저절로 명경지수가 되니 당이 대국이라 해도 오히려 부러워할 바였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인공의 모든 것이 그 규모에 있어 당에 비견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땅이 작아 물산의 생산이 적은 까닭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백성의 수가 적은 때문일 것이다.

구간마다 역마(驛馬)가 있어 유숙할 때는 지역 관리와 인근 선비들의 영접을 받았다. 어느새 ‘최치원’이라는 이름 석 자가 알려졌는지 모두가 칭송하니 너무 과하여 오히려 난처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모두의 눈빛에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갈증과 나라의 흥성을 위한 방책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으니 어깨는 무거웠으나 가슴은 벅찼다. 그들에게 희망의 실마리라도 되어주려면 일신의 영달 따위에 연연치 않고 신분의 한계마저 뛰어넘어야 할 일이었다.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거늘, 하동만 같았으면

   
벚꽃 피는 3월 말부터 해수와 민물이 만나는 섬진강 깊은 곳에서만 난다는 ‘벚굴’.
객사에 여장을 풀고 잠시 쉬고 있자니 하동 태수가 저녁자리를 준비하고 기다린다는 전갈이 왔다. 치원은 의관을 갖추며 생각한다.

당을 떠나올 때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에 ‘회남입신라 겸 송국신등사(淮南入新羅兼送國信等使)’의 직을 더하였다. 이는 귀국임에도 고변 절도사가 황제의 윤허를 받아 조서를 가지고 가는 사신의 형식을 갖추도록 해준 배려였다. 29세 되던 헌강왕 11년(885년) 3월 귀국하여 알현하니 왕께서는 유교를 강론하고 왕의 명을 받아 외교 등의 조서를 작성하는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와 ‘수병부시랑 지서서감(守兵部侍郞 知瑞書監)’의 직을 내리셨다. 앞의 직은 병부의 두 번째 서열에 해당하는 중요 직책이나 여러 명이 있으니 실제의 역할보다는 당에서 종사관 등으로 재직한 것에 대한 예우일 것이고, 지서지감은 문필 기관의 부책임자였다. 이런 여러 관직이 지방 태수에게는 무겁게 여겨질 것이나 치원의 이번 걸음은 다른 왕명을 받든 것이었다.

하동 태수는 지긋한 나이임에도 상석을 권했다. 치원은 몇 번 사양하지만 직에 따른 예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잔에 술을 따른 태수는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먼저 대왕의 안부를 묻는다. 왕명이 궁금한 모양이다.

“지난해 제가 귀국한 뒤로 대왕께서 ‘대숭복사비명’과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명’을 찬하라 명하셨는데, 올해 제가 당에서 지은 여러 글을 모아 ‘계월필경’이라 이름 짓고 올렸더니 또 옥천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명’을 찬하라 명하셨습니다. 앞의 두 비명을 아직 시작도 못하였는데 또 명하심은 서두르라는 뜻이기에 받들어 온 것입니다.”

태수는 밝은 웃음을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명입니다. 옥천사 승려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불자와 만백성이 기뻐하고 칭송할 것입니다.”

“백성들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치원의 물음에 태수는 온화한 낯빛임에도 낮은 한숨을 내쉰다.

“왕경은 덜하겠지만 지방에서는 매년 춘궁기의 어려움이 크지요. 그래도 우리 하동에서는 다행히 굶어죽는 백성은 없습니다. 산이 깊으니 각종 나물이 풍성하여 봄볕이 들면 채취를 시작해 부족한 곡물을 대신하고, 연중 뜯어말린 것으로는 겨울 양식으로 보충합니다. 또 넓은 강이 흘러 바다와 합해지는 길목이니 민물과 짠물의 여러 어물도 생산되어 다른 지역보다는 수월합니다.” 태수는 자신과 가까운 곳에 놓여있는 접시를 들어 치원 앞에 내려놓는다. “벚굴이라 하는데 들어보시지요.”

“벚굴이라니, 처음 듣습니다.” 접시 위에는 반쪽 면 껍질을 받침 삼아 굴이 놓여있었다. 한 점이 손바닥 만한 크기였다. 굴은 당에서는 남쪽 바닷가 어딘가에서 생산된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고, 귀국 후 지난겨울 왕경에서 진상품으로 올라온 것을 맛본 적이 있었다. “이건 다른 굴에 비해 열 곱도 더 크군요. 사시사철 맛볼 수 있습니까 아니면 벚꽃이 피는 이 시기에 식용이 가능한 것입니까?”

“벚꽃이 피는 계절에 나는 굴이라 벚굴이라고도 하고, 해수와 민물이 만나는 맑은 물 속 열 자쯤 되는 깊이에서 채취하는데 실제 물 속에서 봤을 때 그 모양이 마치 활짝 핀 벚꽃 같아서 벚굴이라고 합니다. 맛이 매우 뛰어나 진상하려했으나 아무리 바삐 운송하려 해도 왕경에 닿기 전에 상해버리니 이 계절 우리 하동과 인근 고장만의 특산품이 되고 말아 죄스럽습니다.”

치원이 젓가락으로 집어 입안에 넣자 큰 크기에도 단번에 호로록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아 살짝 씹어 본다. 미처 아래 위가 맞닿기도 전에 톡 터지듯 갈라지며 입 안 가득 퍼지는 시원하고 상큼한 바다 향! 자체로 싱겁거나 짜지 않게 알맞은 간에, 식감은 다른 굴보다 강하니 맛의 또 다른 세계다. 태수가 또 건네주는 접시에 담긴 것은 벚굴을 찐 것인데 탱글탱글 씹히는 느낌과 포근하게 번지는 바다 향이 또한 일품이다.

“굴 두 점에 배까지 부릅니다.” 치원의 감탄에 태수는 맞장구를 친다.

“내일 옥천사로 가시는 길에는 복사꽃이 만개해있을 테니 몸 안은 벚꽃, 밖은 복사꽃, 온통 꽃 세상이겠습니다, 하하.”

축복의 땅이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맹자께서 말씀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생산이 이어지니 인심도 넉넉할 터, 신라 땅 곳곳이 모두 이와 같으면 좋으련만….

■최치원에 대한 오해

   
미리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최치원은 우리나라 유학의 조종(朝宗)으로, 유·불·도를 아우른 사상가로, 우리 문학의 시조 혹은 동국문종(東國文宗)으로 숭앙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조에는 유학자로서 불교를 신앙했다는 이유로 문묘 배향을 철회해야 한다는 과격한 비난을 듣기도 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당과의 인연 등으로 사대모화주의자로 매도되기도 한다.

조선 성리학의 완고함은 억불숭유 정책을 비롯한 그 편협함으로 많은 부작용을 초래한 것은 대략 아는 바이다. 그렇지만 오늘에도 그 완고나 편협의 연장인지 최치원을 매도하는 것은 참으로 난처하다. 어떤 지식과 사상도 시대를 초월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현대와 달리 지식과 정보의 양과 교류가 한정된 그 시대에는 당이 세상의 중심일 수밖에 없었음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또한 최치원은 신라를 내내 ‘동국’으로 칭하며 자부심을 표해왔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김정현·소설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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