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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6> 문학의 땅 하동

신라 최치원 발길 닿았던 하동 … 화해·포용의 철학이 묻어있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3-08 19:22:54
  •  |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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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직 재임 중 인연 쌓은 ‘쌍계사’
- 조선 사림 유생에 영정 강탈당해
- 현재 무성서원·운암영당에 봉안
-
- 고려, 학문정치로 나라 안정되자
- 품계 높여 유교성현 문묘에 배향
- 시호 ‘문창후’ 내리며 문장 숭앙

- 하동과 인연 깊은 이병주·박경리
- ‘지리산’‘토지’에 용서·사랑 담아
- 융합·조화 말한 최치원 정신 이어
   
통치자인 왕의 영정조차 귀한 가운데 무려 1100년이 지났는데도 고운 최치원의 영정이 하동군 운암영당에 고이 모셔져 있다. 운암영당은 하동의 경주 최씨 문중에서 건립한 사당이다. 하동군 제공
하동과 최치원의 인연은 각별하다. 신라 관직에 재임하며 찾았던 유적이 온전하고, 유랑과 마지막 은둔의 발자취도 선명하다. 전해지는 이야기대로 과연 신선이 되었다면 또한 쌍계사 인근 계곡 언저리 어딘가에서 노닐 것 같으니 말이다. 또 하나 특별한 것은 그의 영정(影幀)과 관련된 사연이다.

■쌍계사의 최치원 두 영정

   
최치원은 신라 문성왕 19년인 서기 857년에 태어나 48세 되던 904년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52세 때인 908년에는 인근 호족의 청으로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찬하였다. 그 후로는 눈에 띄는 공적 활동이 없다가 68세 되던 924년 홀연히 사라졌다고 전해지니 지금으로부터 1100년도 이전의 인물이다. 이처럼 오래된 인물 중 초상이 전해지는 이가 얼마나 될까. 비록 후대에 그려진 것이라 해도 통치자인 왕조차 흔치 않은 경우이다. 더군다나 최치원의 영정에 얽힌 사연은 자못 흥미롭다.

영정은 애초 쌍계사에서 비롯됐다. 연재를 진행하며 하나씩 들여다보겠지만 최치원과 쌍계사의 인연이 깊으니 오래전 그곳 승려들이 영정을 그려 대웅전 오른편 향로전에 모셨다. 지금은 향로전이 없지만 금산 군수를 역임한 김도수라는 이가 1727년(영조 3년) 쓴 ‘남유기(南遊記)’라는 기행문에 ‘대웅전 오른편에 향로전이 있고 그 안에 고운의 영정이 걸려있다’ 하였으니 사실임이 분명하다.

   
1700년대 중반, 하동향교의 한 유생이 쌍계사 일대를 유람하다 영정의 주인이 최치원임을 알게 됐다. 당시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며 그 태두로 숭앙하는 최치원의 위패를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과 함께 문묘에 배향하였으나 신라시대 인물인 그의 영정은 생각조차 못했다. 그런데 오래된 그의 영정이 사찰에 봉안돼 있다는 사실은 차라리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이에 사림의 유생들은 쌍계사 영정을 강제로 빼앗아 보관하다가 고려시대 때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무성서원(전북 정읍시 소재)에 봉안했다. 무성서원은 지난해 영주 소수서원, 안동 도산서원, 함양 남계서원 등 8개 서원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쌍계사로서는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노릇이었지만 억압당하는 처지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최치원과의 인연은 끊을 수 없으니 1793년 화승(畵僧)으로 하여금 전해지는 기억들을 모아 영정을 그리하게 하여 다시 봉안했다. 하지만 1825년, 하동의 유생들은 그마저 다시 빼앗아 화개동에 금천사라는 사당을 짓고 모셨는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니 한동안 하동향교에 보관하게 되었다. 다행히 1924년, 하동의 경주 최씨 문중에서 사당을 건립하고 영정을 모시게 되니 운암영당(雲岩影堂)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3월 10일과 9월 10일 두 차례 일제에 항거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영정을 함께 모시고 제례를 올린다.

■최치원의 시호 ‘문창후’의 함의

   
전북 정읍시 무성서원에 보관된 최치원 영정. 고려 관리 복장이다. 정읍시 제공
현재 운암영정은 안전한 보존을 위해 국립진주박물관에 위탁 보관돼 있다. 그런데 2009년 박물관 측의 정밀 조사과정에서 X선을 투과하자 보이지 않던 속 그림이 드러났다. 화면 양쪽에 각각 시봉하는 동자의 모습이 숨겨져 있었으니 최치원이 신선이나 보살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을 유학자로 바꾸기 위해 덧칠한 것이었다.

무성서원에 모셔졌던 쌍계사 원본 영정은 1831년 이모본(移模本, 보고 그림)이 만들어진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본디 영정을 이모하면 원본은 불태운다. 원본에 서려있던 영혼이 새 영정에 깃들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화재 등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려했음인 듯 원본도 따로 보관되어 있다가 1967년께 발견되어 거의 바스러진 상태에서도 이모본이 원본의 형상을 거의 따랐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쌍계사 원본과 운암영정에는 차이가 있을까. 크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복색이다. 운암영정은 조선시대에 그린 것이니 만큼 당시 관복과 유사한 복색이다. 반면 쌍계사 원본은 사모(紗帽)와 단령(團領) 등 고려 말 관리의 평상복 차림이어서 그 제작 시기를 고려 말로 추정할 수 있다. 왕건이 고려의 기치를 든 것은 918년이지만 최치원은 그에 개입한 바 없고, 936년 후삼국이 재통일되기 전에 온전한 신라의 사람으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최치원에게 고려 관리의 옷을 입힌 까닭은 무엇일까.

   
하동 운암영당에 모셔진 최치원 영정. 조선시대 관복이다.
고려는 재통일 후 문치(文治)로 나라가 안정되자 8대 현종 때인 1020년 최치원을 내사령(內史令)에 추증하고 이듬해 문창후(文昌候)로 추시(追諡)하여 유교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에 배향했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동국18현’의 시작이었다. 물론 그는 우리 역사에서 유학의 태두로 숭앙된다. 하지만 ‘문창후’라는 시호는 좀 의미심장하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 지은 시문을 간추린 ‘계원필경(桂園筆耕)’은 현전하는 최고의 문집으로 고려 이후 그를 우리 문학의 비조(鼻祖)로 삼는 상징이다. 뒷날 고려 최고의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는 자신의 저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최치원의 저서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을 소개하고도 ‘열전’에 최치원을 입전하지 않은 것은 그의 문장을 시기한 때문이라 개탄할 정도였으니 ‘문장이 빛나다’는 뜻의 ‘문창’에는 그런 함의도 있을 것이다.

■최치원 맥 잇는 이병주·박경리

   
이병주문학관.
인연이 깊으면 운명이 되기도 하는 것인가. 우리나라 문학의 비조로 칭해지는 최치원과 그처럼 인연 깊은 하동에는 오늘날 ‘이병주문학관’과 ‘박경리문학관’이 있고, 관련 문학제와 문학상 수상도 시행되고 있다. 이병주는 고향이고, 박경리는 통영 출신이지만 그의 대표작 ‘토지’의 무대가 될 곳으로 하동 평사리를 삼은 인연이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전쟁을 전후한 격동의 시대상을 각각 대하소설 ‘지리산’·‘토지’로 담아낸 대한민국 현대문학의 대표이고 거봉이다. 주목할 것은 그들의 글에 담겨진 철학이다.

‘어떤 주의를 가지는 것도 좋고, 어떤 사상을 가지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주의, 그 사상이 남을 강요하고 남의 행복을 짓밟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보다 인간답게 하는 것이라야만 하다’. 이병주가 그의 작품에서 한 말이다. ‘우리에겐 청춘이 없었다. 청춘엔 광택이 있어야 하는 거다. 진리에 대한 정열로써, 포부를 가진 사람의 자부로써, 뭐든 하면 된다는 자신으로써 빛나야 하는 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시대의 울림이 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는 용서의 화해의 철학으로 문학을 했다.

박경리는 또 어떤가. 그의 ‘토지’는 ‘한(恨)’을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생명사상’을 형상화했다고 평가받는다.

최치원이 유·불·도를 아우른 것은 ‘모든 이치는 하나로 융화되어 구별이 없다’는 ‘원융(圓融)’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니 화해와 포용의 철학이다. 이병주·박경리는 그 맥을 잇는다. 과연 하동은 대한민국 ‘문학의 수도’ 아닌가. 혹여 가는 걸음이 있거든 최치원의 추억과 함께 두 문학관을 빠뜨리지 말 일이다.

김정현·소설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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