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서 살고 싶다시던 부친 꿈
- 언론사 퇴직 후 대신 이뤄드려”
어떻게 이 마을에 왔는지를 물었더니 조해훈 박사는 “고3 때 아버지를 따라 쌍계사를 거쳐 불일폭포에 갔다가 내려올 때는 국사암을 통해 목압마을로 왔는데 그때 아버지가 ‘모든 걸 잊고 이 마을에 들어와 차 농사를 지으며 매일 불일폭포나 다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 내내 지워지지 않았는데 퇴직과 함께 우연히 빈 집이 매물로 나왔다는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계약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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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압서사 입구에서 포즈를 잡은 조해훈 박사. |
그는 “아버지가 대구 달성군 논공읍에서 평생 성리학을 공부하며 한시와 현대시를 쓰셨다. 아버지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내가 이곳에 살고 있고, 앞으로 내 아들이 살겠다고 하므로 위안이 된다”고 했다. 목압마을이 조 박사 때문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명품마을로 불린다는 말에 손사래를 저으며 “이곳에 은거하며 차 농사를 짓는 귀농인으로, 단지 마을에 들어온 값을 하기 위해 주민에게 재능기부를 하고 있을 뿐이다”고 했다. “내가 가진 것이 한학과 한시, 현대시 등 인문학뿐이기 때문에 이를 주민에게 돌려 드리려는 것이었다”며 “아는 것은 없지만, 주민과 함께 배워가며 나누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같은 값이면 우리 마을이 좀 더 유명해지고 소득 증대와 이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마을 뒤 목압산 자락에 800여 평의 차밭을 갖고 있다. 처음 이사 올 때는 차나무가 키를 넘겼고 아카시아, 도토리나무 등 잡목이 많아 1년여 동안 차밭 관리에 몸살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일을 잘하지 못해 첫 일 년은 낫 한 자루 들고 차밭에서 살다시피 했단다. 평소 차를 좋아했고 자연에서 생활하는 일을 즐겨 했기에 차나무의 키를 낮춰 지난해부터는 먹고 지인에게 나눌 수 있을 정도는 생산한다.
퇴직 후 화개골로 들어온 최종수 전 한국해양대 학장은 “정부나 자치단체의 지원은 없어도 인문학자 한 사람의 귀농으로 조용하던 산골마을이 명품마을로 바뀌고 있다”며 “조 박사는 사양하고 있지만, 마을의 발전을 위해 목압서사가 좀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안이 검토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완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