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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2> 동백섬 해오름

“한겨울에도 저 붉은 동백처럼 주저앉지 않으리” 치원은 다짐했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2-09 18:58:57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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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군 자질 충만했던 신라 진성여왕
- 귀족·관료 부 독점 뒤 백성 수탈에도
- 골품제 막혀 뜻 못 펼치고 근심 중에
- 수영강 수군 위무 나서자 치원 수행

- 마침 정원대보름에 해운포 머물고
- 백성들 나무와 솔가지 쌓아 불 지펴
- 밤새 풍요 기원 춤추며 달집 태우니
- 어둠 거둔 빛에 왕의 마음도 밝히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어스름 수평선 위로 황적(黃赤)의 여명이 비치는가 싶더니, 끝 모를 대양의 끝자락부터 벌겋게 달아오른 타원으로 붉게 물들이며 번져오기 시작한다, 빛이! 얼마나 가슴 벅찬지, 큰 들숨으로 타오르는 기운을 가슴 가득 채우려는데 청량하고 서늘한 바다의 기운이다. 크게 날숨으로 지난 밤 묵은 기운을 내보내고 다시 들숨을 쉬려는데 그새 수면을 박찬 불덩어리는 둥그런 원으로 불쑥 떠올라 하늘이며, 바다며, 땅이며 천지를 환하게 밝힌다. 천둥 같은 환호로 태양의 신령을 영접하고 싶었지만 겨우 짧은 탄성에 그친 젊은 사내는 어깨를 한껏 펴고 두 팔을 높이 들어 빛의 기운을 정면으로 마주해 경건하게 몸 안에 담는다.

   
고운 최치원, 그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장엄하고 아름다운 해운대 일출의 태양과 푸르고 붉은 동백섬 동백을 만나면 영원한 청년을 떠올리리라.
동방의 빛이다. 어둠을 거두고 온갖 생령에 생명의 기운을 주는 뜨겁고 성스러운 빛의 신령. 저 아득한 대양의 끝에 무엇이 있기에 날마다 쉼 없이 떠올라 생명의 은혜를 베푸는가. 이 땅과의 인연은 어떠하기에 세상 가장 먼저 찾아 밝혀주는가. 과연 신성한 동방의 땅이다, 신라여, 신라여!

사내가 팔을 내리고 맑은 눈으로 주변을 돌아본다. 남녘이라 벌써 이른 봄기운이 느껴지나 아직은 냉기가 여전한 정월임에도 사방은 푸른빛으로 가득하다. 사철 푸른빛을 잃지 않는 소나무. 이보다 더 푸른 것은 소나무 아래 동백이다. 소나무처럼 사시사철 푸르나 반짝이는 빛을 더한 청년의 푸름. 만물이 얼어붙은 겨울에 꽃을 피우는데 이곳의 동백은 붉은꽃이다, 청년의 끓는 피처럼 뜨겁고 진한 빨강의. 문득 ‘나도 저처럼 살리라’ 중얼거린다. ‘세상이 탁해도, 눈앞이 막혀도, 천길 나락을 마주쳐도, 눈멀지 않으리라, 주저앉지 않으리라, 두려워 멈추지 않으리라. 동백의 피와 푸름으로, 천년의 청년으로….’

‘썰물이 조용히 빠진 뒤 거니는 모래밭 / 해지는 산꼭대기엔 저녁노을 끼었네 / 봄빛이 언제나 나를 괴롭히지는 않으리니 / 머지않아 고향 동산 꽃에 취할 터이니’. 당나라에서 고국을 그리며 지었던 시 ‘해변한보(海邊閒步)’가 생각났다.

■진성여왕, 해운포 온천서 기력 회복

고운 최치원. 그가 이곳 해운포에 온 것은 진성왕의 순행을 수행해서였다. 왕께서는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소생으로 둘째 오라버니 정강왕께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붕어하시니 유언에 따라 신라 제51대 왕으로 즉위하셨다. 사심이 없으시고, 할 때가 되어서야 말씀하시고, 한 번 뜻한 바는 꺾지 않는 굳은 의지로 성군의 자질이 충만한 왕이시다. 다만 몸에 병이 많아 한가함을 좋아하시는데, 은혜하고 의지하셨던 숙부이신 각간 김위홍(金魏弘)이 즉위 2년 만에 세상을 버리니 시름이 깊으시어 정무에 소홀하셨다. 이에 외방의 호족들이 납세를 게을리 하며 조정을 멀리하니 군사의 순행을 빌어 그들을 위무하려는 뜻이었다. 수영강 하구의 수군을 돌아보시고 해운포의 온천이 일찍부터 명성 높으니 잠시 심신의 피로를 달래려 머무시는데 마침 정월대보름이다.

“여기에 계셨군요.” 고개를 돌리니 해운포 만호 룡수였다.

대대로 해운포에 살며 농사와 어로로 가산을 늘렸고, 장정들을 훈련시켜 포구를 지키게 하니 모두가 만호라 불렀다. 수영강에 수군이 있고 감비오산 봉수대에도 군사가 있었지만 적은 병력으로 만전을 기할 수 없었으니 동래군수도 그에 대한 만호의 호칭을 묵인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치원은 대왕께서 찾기라도 하는 것인가 싶었지만 룡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한시도 객사를 비우시지 않더니 조반상을 내갔던 아이가 계시지 않다기에 어딜 가셨나 했습니다.”

“과연 온천의 효험이 뛰어난 듯싶습니다. 대왕께서 수삼일 만에 기력을 많이 회복하시어 어젯밤에는 숙면에 드셨다기에 바다와 해를 보려고 나왔습니다.”

“예, 저희도 감격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에는 대왕의 건강과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여느 해보다 크게 대보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객사 앞에서 지신밟기를 시작해 해운포 백사장까지 가서 달집태우기를 할 것입니다.”

정월대보름은 신라 제21대 소지왕(479~500년 재위) 시절 비롯되어 보름 동안 여러 놀이로 마을공동체의 단합을 다지고 건강과 풍요를 기원했다. 지신밟기는 땅속의 악귀와 잡신을 눌러 마을의 안녕과 풍작을 기원하는 놀이이고, 달집태우기는 달맞이하기 좋은 곳에 나무와 솔가지를 쌓아 불을 지피고, 그 불이 다 꺼질 때까지 소리와 춤으로 즐기는 것이다. 대보름달은 풍요의 상징이고, 불은 부정과 사악을 불사르는 정화의 상징이다.

■달집놀이 불빛, 왕의 마음 밝히다

   
해운대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위)와 해운대 동백섬의 동백꽃. 해운대구청 제공
저녁 수랏상을 물린 왕은 담 밖의 떠들썩한 풍물소리에 방을 나왔다가 치원에게 눈길을 돌렸다. “정월대보름 놀이를 하는 모양이오?” 치원은 얼른 허리를 굽혔다. “매년 행하는 놀이입니다만 올해는 대왕께서 이처럼 왕림하시니 천 배는 기뻐합니다. 근동의 백성과 승려들이 모두 옥체강령과 왕실의 번성을 기원하는 마음이 하나같습니다.”

“고마운 일이구려. 그래, 이곳 민심은 어떠하였소?”

“새벽에 만호라는 자를 만났습니다. 대왕과 나라에 대한 충심이 깊었으며 대를 이어온 호족으로 고을 주민을 보살피는 마음도 지극하였습니다.”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말이겠소.” 왕은 한숨을 숨기지 못했다. 물으면 모두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이미 외방의 불온한 기운은 공공연한 바였다.

“백성의 마음은 먹고사는 일에 따르기 십상인데 이곳은 포구가 있는지라 바다에서 생산되는 산물로 배를 곯지는 않으니 믿을 수 있었습니다. 농사를 생업으로 삼는 백성에게는 땅이 전부인데….” 치원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성골·진골의 귀족, 그들과 결탁한 중앙관료들이 토지수탈과 양곡 등의 매점매석으로 부를 독점하니 굶주린 백성의 원성은 왕실을 향했다. 그러나 현능한 군주의 자질로 왕이 되었음에도 골품제의 벽에 막혀 뜻을 펼칠 수 있는 통치체제를 마련할 수 없었으니 그 안타까움은 왕의 병마저 깊게 했다.

“순행이 오래되니 수라가 부실할 것 같아 매우 저어됩니다.” 치원이 말을 돌린 까닭을 알기에 왕은 어두워졌던 낯빛을 밝게 했다.

“아니오. 생선살로 만들었다는 맑은 탕이 매우 시원하여 입맛을 돋우고 속도 편케 해주고 있소. 온천도 효험이 크게 있어 며칠 더 묵을 요량이오. 신은 내일부터 객사일은 유념치 말고 해운포 백성들의 애로를 듣고 잘 위로해주시오.”

멀리서 큰 함성과 함께 벌건 불빛이 하늘 높이 타오르고 있었다. 달집 태우는 빛이었다. 왕께서 환한 미소를 지으시니 치원의 마음도 모처럼 밝아졌다.

김정현·소설가

일러스트 = 백정록/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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