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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1> 최치원의 ‘해운대’

천년제국 신라 꿈꾸던 고운, 동백섬 바위에 충심 새겼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2-02 19:42:39
  •  |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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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라 과거시험 장원급제
- ‘격황소서’로 천하에 명성

- 민초 고난에 가슴 아파했고
- 개혁으로 강한 나라 꿈꿔
- 귀국 후 올린 ‘시무십여조’
- 귀족 벽에 막혀 시행 불발
- 천하 주유하다 가야산 은거

- 원융으로 화합 추구한 청년
- 갈등의 시대 나아갈 길 제시

최치원은 어려운 옛사람으로 각인돼 있다. 그에게서 ‘학문’ ‘신선’ 등의 아우라를 벗기면 원융(圓融)으로 화합의 추구를 멈추지 않은 청년이었음을 알게 된다. 갈등의 이 시대, 그에게서 화합과 천년의 푸른 희망을 찾아보려 한다.
부산에 가면 시내에서 일을 봐도 잠은 해운대에서 자려한다. 이른 아침 해변을 따라 동백섬을 찾으면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비와 동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산 이은상 선생 국역의 ‘봄 새벽’을 비롯한 9편의 시는 언제 읽어도 새롭고 뜨겁다.
   
해운대와 최치원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강추위가 한풀 꺾인 평일 오후 우리나라 최초로 해운대 동백섬에 조성된 최치원광장을 찾은 관광객이 최치원 동상을 촬영하고 있다. 김성효 전문기자 kimsh@kookje.co.kr
■최치원, 그는 누구인가

신라 47대 헌안왕 원년인 서기 857년 출생, 12세 어린 나이에 말조차 통하지 않은 당(唐)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 때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했다. 2년 뒤, 약관 스물에 선주(宣州) 율수현(溧水縣) 현위(縣尉)로 보임돼 당대의 석학·문장가와 교유하며 천년이 지나도록 빛나는 문명(文名)을 밝혔다.

특히 ‘황소의 난’ 토벌사령관인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병(高騈) 휘하에서 도통순관(都統巡官)의 직으로 종군하며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써 반란의 수괴가 읽다가 놀라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 하니 천하가 찬탄한 명문으로, 그의 나이 25세의 일이었다. 당 조정은 공을 치하하여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使內供奉)의 직함을 내렸고, 당 황제로부터 자색 장복(章服)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최치원은 당은 물론 왜(倭), 발해 등 당대의 세계라 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석학으로, 천재로, 천년 왕국 조국 신라의 더 빛나는 천년을 꿈꾸었으리라. 그러나 고국을 떠난 지 18년 만에 스물아홉의 나이로 귀국한 그의 앞에는 골품제라는 철옹성이 버티고 있었으니,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성골과 진골세력이었다. 더하여 오래지 않아 당의 혼란이 동쪽으로 번져온 듯 진성여왕의 실정과 함께 도처에서 일어난 반란이 들불처럼 번졌다. 이에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국정쇄신책을 올렸으나 왕도 제어할 수 없는 귀족세력의 벽에 막혀 시행되지 못했다.

유불도(儒彿道)를 아우르는 높은 학문과 철학, 당나라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한 제국의 위용. 비록 당은 300년도 못 돼 기울어가고 있었지만 신라는 천년을 지켜온 왕국이 아니던가. 새로운 피로 당에 버금가는 제국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청운의 꿈도 품었으리라. 그러나 점점 사혈(死血)로 굳어가면서도 기어이 수혈을 거부하니 마침내 관직을 버린 채 천하를 주유하며 후세를 위한 반석을 글로 남기다 가야산에 은거하니 세상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한다.

   
1970년 초반 포근한 해운대 해수욕장 모습과 마천루가 들어선 지금의 모습. 해운대구 제공
■최치원의 석각, ‘해운대’

최치원에게는 ‘고운(孤雲)’과 ‘해운(海雲)’이 ‘자(字)’ 또는 ‘호(號)’의 부명(副名)으로 따른다. 혹자는 ‘고운’은 ‘호’이고 ‘해운’은 ‘자’라 하고, 둘 모두 ‘자’ 또는 ‘호’라고도 한다. 언제부터 ‘고운’과 ‘해운’을 사용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운’이라면 ‘외로운 구름’으로 ‘부유하는 인생의 덧없음’을 말하거나, ‘하늘 높이 떠있는 우뚝한 구름’으로 ‘높고 고고한 포부’의 의미를 내포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해운’은 그 의미를 알기에 성글다.

최치원의 석각은 한반도 동남 일대에 여럿 있고 모두 연유와 의미가 분명하다. 그런데 유독 동백섬에만 자신의 부명 ‘해운’을 따 ‘해운대(海雲臺)’라는 글을 남겼을까.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자나 남기려는 허명을 좇는 얇은 지식인이 아니었다.

지금의 해운대구 일대는 고대로부터 장산국(萇山國)과 같은 부족국가가 있었고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포구가 형성됐다. 옛 양산 땅(현 부산 기장군)에서 발원해 동래를 거쳐 해운대구에서 바다와 합해지는 수영강 하구 맞은편에는 손에 잡힐 듯 대마도가 있으니 일찍부터 왜구의 전진기지가 됐다. 그들이 수영강을 거스르면 금세 동래까지 다다르니 군사적요충지로 진작부터 수군(水軍)이 주둔했다.

동백섬. 공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일찍부터 해운포(海雲浦)에서 조수에 따라 걸어 드나든 섬으로 전해진다. ‘해운대’는 그 ‘해운포’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최치원이 동백섬에서 자연의 운치만 감상하다 제 멋에 취해 글귀를 남겼냐는 것이다. 그럴 리 없다. 수영만의 수군진영을 내다보며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고, 대마도를 보며 ‘격황소서’를 짓던 심정으로 적을 다스리는 위엄과 외교를 말했을 테니, 명심하여 잊지 말라는 뜻으로 영원의 상징인 바위에 새기게 했으리라.

과연 오늘에도 수영만 가까이에는 해군기지가, 동백섬에는 누리마루APEC하우스가 그 뜻을 잇고 있지 않은가!

■천년의 청년, 최치원

   
동백섬은 빨간 동백꽃의 섬이다. 잎은 사시사철 푸르고, 한겨울 꽃을 피우면 펄펄 끓는 피처럼 붉으니 과연 청년의 기상이 아닌가. 꽃말마저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니 또한 청년의 ‘순수’다.

최치원은 어떤가. 그는 좌절하여 은둔한, 나약하게 늙어간 지식인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세상에서 보이지 않게 된 그날까지, 한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붓을 들어 뜻을 펼쳤다. 고단한 민초에 가슴 아파했고, 개혁으로 강한 나라를 꿈꿨으며, 새 세상의 바람에 수긍하면서도 저물어가는 조국에 대한 충심을 바꾸지 않았다. 기어이 신선이 되었다면 그 또한 사람들의 복된 이상향을 위한 멈추지 않는 발걸음일 테니 그야말로 천년의 청춘 아닌가. 고운 최치원, 그의 이야기를 동백섬에서 시작하는 까닭이다.

신라는 성을 차별하지 않아 여권(女權)이 당당했다. 진흥왕 조에 시행된 ‘원화(源花)’의 예가 그 또렷한 증거이다. 청소년 수련단체로 결성된 원화의 장(長)은 아름다운 여염집 처녀로 임명했다. 효도·우애·충성·신의를 가르쳐 신라의 기둥과 미래로 삼았던 그들이 뒷날 화랑으로 확장되었으니 300여 년 시간이 흘렀다고 같은 왕조에서 그 정신이 사라졌을 리 없지 않은가. 10여 년 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비로소 널리 알려진 ‘미실’의 사례에서 보듯 신라는 남녀의 성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문란이 아니라 차별 없는 자유의 당당함은 오랜 여성 억압의 유령을 걷어내려는 우리 시대사조에서도 돌아볼 가치가 있음이다. 최치원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여성에 대한 의식을 근본으로 삼는다면 이에 걸맞은 사랑이야기는 정결하고 뜨거울 것이다.

최치원이 ‘해운대’ 글귀를 남긴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혹자는 은둔에 앞선 유랑의 행보였으리라 말한다. 다른 단서도 있다. 동백섬 건너에는 예부터 ‘해운포온천’이 유명했다. 정무에 지친 왕이 심신의 피로를 달래려, 혹은 군사 순행(巡幸)길에 들러 쉬었다면 그도 수행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대(臺)’라면 쌓아 올린 인공의 건축물이다. 한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왕 쌓는 김에 지붕을 얹어 잠시나마 편히 머무를 수 있게 배려할 수도 있다. 그럼 ‘대’는 누가 쌓은 것일까.

수영만 수군과 별도로 해운포에 만호(萬戶)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만호는 고려시대 이후 사서에 등장하고 봉록을 받는 관리였다. 그러나 조선조에도 작은 고을에서는 대를 이은 지역 호족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보좌하여 육방관속을 이끌었다. 이미 장산국 등 오랜 전통의 지역이고 적의 침입이 쉬운 포구인 데다 아직 해운포까지 관리를 보낼 나라 형편은 아니었으니 그에 준하는 이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이가 최치원을 만나 보살핌과 지킴의 방책을 들어 눈과 귀가 밝아졌다면 어찌 떨리는 마음의 정성을 다하지 않았겠는가. 김정현·소설가

제자(題字) = 이희순 , 일러스트 = 백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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