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지 여성에 떠맡기고 연락두절
- 의붓어머니가 양육 우리말 못 해
- 부산남고 동문, 여행 중 알게 돼
- 판잣집서 살던 모녀 2년간 후원
2005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필리핀을 찾았던 김지현(당시 4세·가명) 양은 그때부터 낯선 땅에 홀로 남겨졌다. 14년이 흐른 지금, 김 양은 한국말을 전혀 못 한다. 부모 모두 한국인이지만, 사실상 필리핀인으로 자랐다.
친부는 14년 전 혼외 자녀로 추정되는 김 양을 필리핀 여성에게 떠맡긴 뒤 연락을 끊었다. 다행히 이 여성은 친부로부터 소식이 없자 의붓어머니가 돼 김 양을 정성껏 양육했다. 자신도 판잣집에 사는 등 형편이 어려웠지만, 애틋하게 보살폈다.
의붓어머니도 김 양을 필리핀에 두고 떠난 친부가 부산 출신이라는 점 외에는 별달리 아는 게 없다. 친부가 한국에 사는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 때문에 현재 김 양의 국적이 어디인지, 왜 한국 초등학교 입학 시점 때 문제가 되지 않았는지, 한국에서 출생신고가 정상적으로 이뤄졌는지 등은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게 없다.
최근 한의사 부부가 정신장애를 앓는 친아들을 ‘코피노(필리핀 혼혈아)’라고 속여 필리핀에 유기한 사건과 유사하다. 아동이 해외에 버려져도 확인조차 안 되는 우리 사회의 허술한 보호 체계(국제신문 지난 18일 자 6면 등 보도)가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양의 사연은 부산남고 23기 동기회를 통해 알려졌다. 부산남고 졸업생인 부산 성보냉장 황정헌(59) 이사는 2017년 6월 필리핀으로 여행 갔다가 우연히 김 양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황 이사는 김 양이 한국 아이인데 한국말을 하나도 할 줄 모르고, 오랫동안 필리핀에서 산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황 이사는 “한국으로 데려가 친부모를 찾아보겠다”는 제안도 했지만, 의붓어머니는 “가슴으로 낳은 딸”이라며 계속 양육하겠다고 만류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황 이사는 부산남고 23기 동기회에 이 사실을 알렸고, 이후 동기 등 12명은 2년여간 매달 1만5000페소(한화 35만 원가량) 정도를 후원해 왔다. 황 이사가 1년에 5, 6차례 김 양 집을 방문해 후원금과 선물 등을 전달한다. 동기들은 다 함께 필리핀을 직접 찾아 김 양을 격려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덕분에 김 양과 의붓어머니는 오랫동안 살던 판잣집에서 최근 제법 깨끗한 집으로 옮겼다. 그리 넓은 집은 아니지만, 이사한 후 김 양과 의붓어머니의 얼굴은 부쩍 밝아졌다. 김 양은 현재 필리핀에서 교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
황 이사는 29일 “김 양이 내년에 대학에 입학할 나이라 동기들과 장학금도 따로 모아뒀다”며 “정신장애를 앓는 아동이 필리핀에 유기됐다는 보도를 보고 정말 마음이 아팠다. 코피노도 많다는데 우리가 반성해야 한다. 김 양에 대한 후원도 한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배지열 기자 heat89@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