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병 아닌 함께 살아가야할 현상
- 삶의 질 높이는 방법 구체화
- 아이디어 공모 … 치매견 등 도입
- 길 잃음 방지장치 ‘버디’ 제품화
- 고령화 가속 비용 눈덩이 추산
- 사회보장 고령자 전체로 확대
- 치매 완화 ‘기억카페’ 시범운영
- 기억 되살리는 앱 개발도 진행
‘디자인 부서가 치매를 담당한다?’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하지만, 영국에선 정부 자문기구인 디자인위원회(Design Council UK)가 치매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로 치자면 시 공공기관인 부산디자인센터가 치매 프로젝트를 하는 것이다. ‘도시 디자인’이란 시민의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도구이며, 그런 점에서 디자인을 통해 치매에 걸렸어도 더 나은 생을 보낼 방법을 연구하고 구체화한다는 설명이다. 영국에는 현재 80만 명 이상이 치매를 앓고 있다. 2051년이면 2배 이상인 170만 명 정도로 급증할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기준 치매 관련 비용은 270억 파운드(40조 원)이며, 앞으로 그 비용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 전망이다. 국민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치매를 두고 영국은 ‘디자인 도전(Design Challenge)’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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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디자인위원회가 ‘치매와 함께 잘 살기’ 프로젝트를 통해 치매 어르신의 안내견 역할을 하는 치매견을 훈련, 보급하고 있다. 영국 디자인위원회 제공 |
■‘치매와 함께 잘 살기’
디자인위원회는 2011년 영국 보건부와 함께 ‘치매와 함께 잘 살기(Living Well with Dementia)’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치매와 함께하는 삶’에 필요한 수요를 살피고, 이를 지원할 제품 및 서비스 개발에 착수한 것. 치매를 멀리하고 퇴치해야 할 질병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나이 듦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디자인위원회는 치매에 걸렸어도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등에 격리되지 않고 평생을 살아온 거주지에서 계속 살며,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 돌봄)를 받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전국적으로 공모했다. 154건이 접수된 공모전 최종 결과 5가지 아이디어를 채택, 제품화에 나섰다.
‘치매견(Dementia Dog)’이 대표적이다. 시각장애인 안내견처럼 치매 노인에 특화된 안내견을 훈련하는 사업이다. 치매 노인은 기억력 문제로 외출한 뒤 길을 잃어버리는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밖으로 나갈 때 치매견을 데리고 다니면 집 위치를 기억해내지 못해도 개가 안내해 실종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또한 약 복용 시간을 알려줘 약물치료에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 동물과 함께 생활하면 노인이 정서적으로 안정된다는 장점이 있다. 치매견은 보통 2, 3년 훈련을 통해 육성하므로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업이다. 현재 북부 스코틀랜드 지역에 10마리가 훈련·보급돼 실제 치매 노인과 생활하고 있다.
‘버디(Buddi)’는 위치를 알려주는 손목 착용 신호장치다. 외출했으나 집으로 가는 길을 잊어버렸을 때 이 장치를 누르면 위치 정보가 가족에게 전달된다. ‘오드(Ode)’는 식욕을 돋워주는 발향기다. 치매에 걸리면 우울한 기분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식욕이 떨어진다. 많이 먹지 못해 기력이 쇠해지고, 이는 치매 증상 악화로 연결된다. 베이커리에 가면 빵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는 데에서 착안, 맛있는 음식향을 발산해 먹기를 유도한다. ‘그루플(Grouple)’은 치매 노인과 가족, 그들을 맡은 지역사회 관련자가 돌봄에 대한 모든 것을 공유하는 소셜 네트워크다. ‘시간 거래(Trading Times)’는 치매 어르신을 돌보는 가족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르신을 돌보면서도 하루 2, 3시간 짧게 일을 해 경제적인 문제가 없도록 돕는다는 취지다.
디자인위원회는 공모전을 통해 이 5개 아이디어를 채택한 뒤 기업과 연결해 제품화했다. ‘치매와 함께 잘 살기’ 연구개발(R&D)에 들어간 비용은 36만 파운드(5억3400만 원)다. 하지만 모두가 시장에 출시된 것은 아니다. 오드처럼 시장성이 낮아 실제 출시는 불발된 제품도 있었다.
■‘나이 듦을 바꾸다’
디자인위원회는 ‘치매와 함께 잘 살기’를 끝내고, 2016년부터는 ‘나이 듦을 바꾸다(Transform Ageing)’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치매라는 노화의 한 현상을 넘어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 전체를 대상으로 생길 수 있는 질병을 최대한 예방하고, 고령자를 돌보는 지역사회 체계를 더욱 공고히 만든다는 취지다. 디자인위원회 엘리 런시 성장혁신국장은 “‘치매와 함께 잘 살기’는 치매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수요를 조사하고 제품 및 서비스를 개발, 보급하는 프로젝트였다면 ‘나이 듦을 바꾸다’는 치매뿐 아니라 전체 고령화 과정에서 좀 더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나이 들어갈 수 있는 방안을 기획하는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치매에서 노화 전체로, 기존 프로젝트보다 범위가 훨씬 커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전환은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는 데서 온 위기감 때문이다. 영국 통계청 조사를 보면 2020년 50세 이상 인구가 전체 노동인구의 3분의 1(32%)을 차지하며, 성인 인구의 절반(47%)에 육박할 전망이다. ‘건강한 나이 듦’으로 치매 등 노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질병을 막거나 발병 속도를 최대한 늦춰 사회적 비용을 줄여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생긴 것이다.
‘나이 듦을 바꾸다’ 프로젝트는 영국 남서부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시행 중이다. 3년간 300만 파운드(44억5000만 원)가 투입돼 지역 사회적기업을 연결, 고령사회에 대한 커뮤니티 활동을 기획, 발굴한다. ‘기억은 중요하다(Memory Matters)’ 프로젝트가 눈에 띈다. 치매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디자인된 프로그램으로, 치매 환자가 동네 친구와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커뮤니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억카페(치매카페)’를 만들었다. 기억카페는 치매에 걸리지 않았어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지역민에게 열린 공간이다. 또한 어르신의 과거 사진이나 좋아하는 음악을 모아 기억력을 되살리는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런시 국장은 “‘나이 듦을 바꾸다’를 통해 늙더라도 활동적이고 행복하며, 건강하고 커뮤니티와 연결되는 삶을 지향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런던=이선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