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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돌덩이 나르고 뗏장 떼와 놓았다, 400년 전 ‘무지개 다리’

사라진 온천천 이섭교

이야기 공작소- 도란도란 연제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2-20 19:49:04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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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비 오면 떠내려가던 나무다리
- 튼튼한 교량이 동래부의 숙원
- 백성들 자진 부역하고 자재 모아
- 인조 13년 봄, 감격의 개통식

- 무지개 아치 4개로 홍예교 형태
- 일제 때 비석 옮겨지는 수모
- 다리 사라지고 그 위치도 모호
- 아름다웠던 옛 다리 원형 찾아야

을해년(1635년, 조선 인조 13) 어느 봄날. 동래 휴산역(休山驛)의 주마등(走馬燈)이 바람에 까물거린다. 주마등 모서리 끝에 매달린 네 개의 말 형상이 바람을 따라 빙글빙글 돈다. 역졸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휴산역 주변이 시끌벅적하다. 휴산역은 현 동래구 낙민초등 일대에 자리했다는 역참(驛站)이다. 영남대로(황산도)의 기·종착지로서 좌수영과 기장, 해운대로 가는 길목이면서 동래부의 군사·행정적 요충지다. 동래부에서 부사가 행차한다는 소식과 부산진에서 첨사가, 좌수영에서 수사가 막 출발했다는 소식이 닿았다. 이섭교(利涉橋) 개통일이다. 부중(府中) 전체가 살짝 들뜨고 긴장된 분위기다.
   
1900년대 온천천의 옛 이섭교. 동래읍성에서 좌수영으로 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했던 다리라고 한다. 오른쪽 사진은 오늘날의 이섭교 모습.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국제신문DB
■ 참여와 울력으로 숙원 해결

이섭교 건설은 동래부의 숙원이자 주민들의 으뜸 민원이었다. 이태 전 홍수가 닥쳤을 때 이섭교에 걸려 있던 나무다리가 떠내려갔다. 일찍이 부역을 통해 나무다리를 다시 놓곤 했지만, 비만 오면 떠내려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주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징검다리를 놓아 겨우 이쪽저쪽을 건너다닐 수 있었다.

다리를 놓자는 의견이 돌자 십시일반 기부금이 모이고 울력이 더해졌다. 기부금을 못 내는 사람은 돌덩이를 가져오고 뗏장을 떼왔다. 부역이나 강권이 아니라 자발적 참여와 울력으로 다리가 조성됐다는 것도 특기할 일이다.

‘갑술년(인조 12, 1634) 겨울에 부중(府中)의 몇 사람이 개연히 이전부터 수리하고자 하는 뜻을 이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재물을 거두었다. 돌을 옮기는 부역에 백성들이 자진하여 응하니, 다음 해 봄에 일을 완전히 끝낼 수 있었다. 이는 실로 지난날 이루지 못한 뜻을 불과 며칠 만에 성취한 것이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한 김진한(金振漢)의 공을 어찌 잊으며, 이 일을 끝낸 신만제(辛萬齊)의 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았고 도선장(渡船場)이 넘쳐도 수레바퀴는 젖지 아니한즉슨 이 다리를 건너는 자는 의당 그 공을 찬미하고 칭송하며 무수한 세월이 지나가도 그 사례(謝禮)하는 마음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로다’. - 숭정후(崇禎後) 을해(인조 13, 1635) 봄날, 별좌(別座) 석(釋) 상유(尙裕).

문장이 아름답다. ‘상유’라는 자가 쓴 이섭교 비문은 수백 년 풍상의 시간을 건너뛰어 당시의 설렘과 기쁨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별좌(別坐)는 조선 시대 관아에 둔 정·종5품 벼슬로, 흔히 교서관 상의원이라 부른다. 별좌 상유는 이섭교가 세워지게 된 경위를 자세히, 유려하게 적어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했다.

이섭교 개통 현장은 축제 무드다. 동래 교방청의 내로라하는 예인들이 나와 풍악을 울리고 찢어지는 음색의 날라리가 금정산과 장산 자락을 쩡쩡 울린다. 동래부사와 부산진첨사, 좌수사, 동래향교의 전교가 나왔는데 얼굴이 하나같이 밝다. 군관과 향리, 역졸들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자리를 함께한 백성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이섭교는 보기만 해도 뿌듯하다. 아름답고 튼튼한 다리다. 이섭교의 백미는 4번 연속해서 돌아간 홍예(무지개) 형태의 수구(水口) 부분이다. 컴퍼스로 똑같이 돌린 듯한 4개의 홍예는 하늘의 무지개를 훔쳐 와 걸어놓은 모습이다. 어찌 보니 안경 두 개를 펼친 것 같다. 다리 자체가 예술품이다.

■ 예술작품 같은 홍예교

이섭교 비문에는 재물 기부자와 공력을 쏟은 자들의 이름이 줄줄이 적혔건만, 다리 제작자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아마 당대 최고의 장인과 대목수였을 것이다. 끝내 그 이름을 감추었으니 그마저 아름다운 것인데, 못난 후손은 그 아름다운 다리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뒤늦게 탄식한다.

홍예, 즉 아치(Arch)는 자연스러운 힘의 흐름으로 기하학적 견고함과 극적 조형미를 연출하는 구조물이다. 홍예교는 지면에 면한 하부부터 원형으로 내쌓기 하여 완전한 반원형을 이룬다. 홍예교는 수평 반력이 지간(支間) 내 임의의 점에서 압축력으로 작용하게 되어 구조적으로 안정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치는 문명의 무지개였다. 홍예교는 서기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건설되었고,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인디아 중국에도 있었으며 그 유적의 일부가 남아 있다. 로마시대는 홍예교 중흥기였다. 로마인은 홍예교의 역학적 특성을 정확히 파악해 도시를 아름답게 가꿨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홍예교로는 8세기대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경복궁의 영제교, 영산 만년교, 순천 선암사의 승선교, 강경 미내다리 등이 꼽힌다.

■ 개축과 수리의 자취
   
이섭교는 스스로 스토리텔링이 되는 옛 다리다. 조성 경위와 내력을 담은 장중한 비석(사진)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비석에는 이섭교 가설 당시 참여했던 사람들의 직책과 성명, 개축에 협력한 각 면 계의 기록이 담겼다. 참여한 계는 동면 10계, 서면 6계, 북면 8계, 남촌 9계, 동평면 13계, 사천면 9계, 읍내면 14계 등 총 69계다. 동래부 전체가 동참한 셈이다. 이섭교는 지금으로 치면 광안대교에 버금가는 대역사였고, 당대 최고·최대의 홍예 교량이었다.

이섭교는 1634~1635년 가설되었으나, 내력을 담은 이섭교비는 60년이 지난 1695년 세워진 것 같다. 이희룡 동래부사(재임 1694년 9월~1696년 11월)는 세월과 함께 허물어진 이섭교를 개축하면서 별좌 상유의 가설 당시 글과 개축 참여자들의 면면을 적은 역사적 기념비를 세웠다. 하고 보면, 자신의 치적 홍보를 겸한 비석이었다. 덮개돌이 없는 이섭교비(부산시 기념물 제33호)는 높이 237㎝, 폭 110㎝, 두께 28㎝이다. 비석 윗부분이 반달 모양으로 유려하다. 반달 모양은 다리에 구현된 홍예와 절묘하게 조응한다. 강 위에 무지개가 걸렸으니 육상에도 무지개를 띄워 화답하는 모양새다. 비문의 행간에 묻어나는 민본사상과 울력을 통한 상부상조의 정신은 당시 동래부 사람들의 삶 일단을 비춰준다. 옛사람들은 다리 하나를 놓더라도 자연과 어울리게 놓았고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도 경제적 합심 협력하는 법을 잊지 않았다.

■ 이섭대천의 메시지

이섭교는 일제강점기에 수모와 아픔을 겪었다. 1930년께 일제는 시가지 정비 명목으로 동래부의 자존심과도 같은 내주축성비와 독진대아문, 이섭교비 등을 동래 금강공원 구석에 옮겨 놓는다. 당시 금강공원은 일본인 유력자의 별장이었다. 그렇게 8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섭교비는 2012년에야 간신히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시민단체와 향토사학자들이 문화재 제자리 운동을 벌인 결과였다. 눈물겨운 귀향은 단 몇 방울의 회한, 일시적인 감격으로 끝이었다. 비석이 돌아온 자리는 우리가 ‘이섭교 자리’로 추정하고 얼렁뚱땅 보행교를 놓은 곳이다. 온천천의 연산교와 연안교 사이다. 그러나 비석은 돌아왔지만 이섭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옛 사진이 보여주는 이섭교는 절묘한 4개의 아치와 전통미 조형미 균형미를 동시에 간직한 명품이다. 주민들은 이섭교를 동래 안경교(眼鏡橋)로 불렀다. 안경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섭교에서는 답교(踏橋), 즉 다리밟기 행사도 열렸다. 매년 정월 대보름 밤이 되면 주민들은 이섭교를 걸어서 왔다 갔다 했다. 정월 대보름 밤에 열두 곳의 다리를 밟으면 일 년 열두 달 다릿병을 앓지 않고 액운을 벗어난다는 속설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섭대천(利涉大川). 주역의 괘에는 ‘이섭대천’이라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큰 내를 건너 이로웠다’는 의미다. 학문과 덕으로 몸을 기르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이겨낼 수 있고 결국 세상이 이롭게 된다는 말이다.

   
온천천에 이섭교가 놓인 건 바로 ‘세상을 이롭게 함’이었다. 이섭교가 있는 온천천은 대천이 아니지만, 큰 강 못지않게 ‘건너면 이로운 일이 생기는(利涉)’ 은혜로운 하천이다. 이섭교는 자그마치 400년의 역사를 품은 옛 다리다. 사라진 역사의 무지개, 이섭교의 원형을 되찾아야 한다.

박창희 스토리랩 수작 대표

※ 공동기획: 부산연제구·국제신문·(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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