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독립운동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이회영 일가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등 6형제를 일컫는다. 이들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9대조를 제외하고는 후손 모두 정승 판서 참판 등을 지낸 명문가였다. 형제 가운데 넷째인 이회영이 일가의 만주 망명을 주장했으며, 가장 개방적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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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이회영. 국가보훈처 제공 |
이회영은 신민회를 조직해 헤이그 밀사, 고종 국외망명 등에 관여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강제 합병되자 형제들과 함께 국외 독립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로 향한다. 이들은 재산을 급히 처분해 40만 원(소값 기준 현재 가치 600억 원·땅값 기준 2조 원)을 마련했다. 만주로 건너간 일가는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들의 만주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들고간 돈은 3년 만에 바닥이 났다. 그럼에도 이들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독립 운동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첫째 이건영은 상해에서 독립운동 중 숨졌고, 가장 재산이 많았던 둘째 이석영은 두 아들을 잃고 굶어죽었다. 셋째 이철영은 풍토병으로, 넷째 이회영은 고문으로 숨졌다. 여섯째 이호영은 밀정 처단을 위한 다물단 활동 중 가족 전체가 행방불명됐다.
결국 다섯째 이시영만이 살아서 광복을 맞았다. 그는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고,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신흥학교(지금의 경희대)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폭정에 실망감을 느껴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에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의 대국민성명서를 내고 부통령직을 내던졌다. 이후 이시영은 피란지 부산 동래의 자택에서 1953년 4월 병사한다.
월남 이상재는 “해방이 되면 우당(이회영의 호) 가문에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박호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