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래 정 씨 청렴리의 막내 정서
- 의종 때 모함 받아 동래로 유배
- 귀양지 냇가 옆에 정자 짓고
- “곧 부르겠다”는 임금의 말 새겨
- 고려가요 ‘정과정’ 지어 불러
- 유배지 터 망미동 인근 추측
- 표지석·시비 세우고 뜻 기려
■ 우리말 고려가요 중 작자 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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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수영구 망미동 정과정. 온천천과 수영강이 만나는 지점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1985년 토향회와 정과정시비건립추진위원회가 세웠다. |
지금으로부터 860여 년 전, 온천천과 반여동 쪽에서 내려오는 사천(絲川)이 어우러져 수영천이 되어 바다로 흘러내리는 큰냇길, 좌수영성 북문 북쪽 토현(土峴) 동쪽 수영강 길가에 소박하게 짚 지붕을 인 정과정(鄭瓜亭)이 있었다. 고려 의종 때 왕의 미움을 받아 귀양살이온 정서(鄭敍)가 냇가에 띠집 짓고, 정자 지어 살며 왕의 분노가 풀려 다시 불러줄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시로 짓고, 곡을 다듬어 불렀으니, 고려가요 ‘정과정곡’이다.
박병채(朴炳采)가 현대어로 풀어내었다.
‘내 님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더니/접동새와 나는 (울고 지내는 모양이) 비슷합니다/(그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거짓인 줄을 (오직) 지새는 새벽달과 새벽별만이 아실 것입니다/(살아서) 임과 함께 한자리에 가고 싶습니다. 아 ~/(임의 뜻을) 어기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참으로) 과실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임께서 召命하실 줄 알았더니) 말짱한 말씀(거짓말)이었군요 (참말) 죽고만 싶은 것이여. 아 ~/임께서 벌써 저를 잊으셨습니까/맙소서 임이시어, 돌려 들으시어 사랑해 주소서’.
임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 산에 사는 접동새와 비슷하다고 하였고, 자기 죄가 임금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지 않으며, 참소(讖訴) 당한 바가 허망하다는 것을 새벽달과 새벽별이 알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넋이라도 한데 가고 싶다고 하였던 사람이 누구였던가를 따져 묻고 임금이 자기를 버린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잘못도 허물도 전혀 없다고 하며, 그 모두가 참소하는 무리의 말일 따름이니 죽고 싶다고 읊고 있다. 마지막 두 소절에는 임이 자기를 벌써 잊었는지 묻고, 돌려 총애하여줄 것을 간청하였다.
의종 5년(1151), 의종의 아우 고려 문인 대녕후 경(大寧侯 暻)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참소를 입어 동래로 귀양 온 정서가 임금의 소환을 간절히 기다리며 지은 ‘정과정’은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가요 중 작자가 확실한 노래이다.
■ 충신연주지사의 대표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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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과정 노래비. |
정서는 동래 정씨의 시조 정문도(鄭文道)의 증손자로 정문도-정목(鄭穆)-정항(鄭沆)-정서로 이어지는 가계이다. 그는 40년간 요직에 있었음에도 청빈한 삶을 고집해 칭송이 자자했던 정항의 4남 3녀 중 막내였다. 부인은 김부식과 함께 묘청의 난을 진압한 임원후의 차녀이다. 고려 17대 인종(仁宗)의 비 공예태후(恭睿太后) 동생의 남편이었으니 인종과는 동서지간이다.
정서는 문장과 음률에 뛰어난 데다 묵죽화에도 능해 15살에 즉위한 인종과도 같은 재예(才藝)를 지닌 예인으로 교감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동서인 인종이 죽고 아들 의종이 즉위하자 환관 정함과 문사 김존중 등의 모함을 받아 그들의 참소로 1151년 동래로 유배되고 말았다.
의종이 이모부 정서를 귀양 보내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의종의 인물 됨됨이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사’에 보면 세자 현(晛)이 어리석고 성질이 가벼워 동생인 대녕후 경에 못 미쳐, 인종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어야 할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인종이 세자 시독관(侍讀官) 정습명에게 세자의 제왕 교육을 당부하고 전위하지만, 인종의 사후 왕위를 이은 의종은 아첨하기 좋아하는 환관과 신하들 말에 혹하여 선왕의 당부를 잊어버린다. 선왕의 분부를 지키지 못함이 못내 안타까운 정습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1151년). 이에 신이 난 주위 간신들이 자신들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에게 대녕후 경(의종의 동생)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역적모의를 날조하여 대역죄를 씌워 전왕 인종의 측근 정서는 동래로, 다른 신하들은 청주 등으로 귀양 보낸다. 귀양 떠나는 정서에게 의종은 ‘신하들의 성화가 극성이니 조금만 참으면 곧 부르마’라고 속삭였으나, 귀양길은 풀릴 줄 모르고 유배 6년 뒤 대녕후 경이 천안으로 쫓겨날 때 정서도 거제도로 유배지가 바뀌기까지 했다.
정서는 귀양지 냇가 띠집 곁에 오이 씨앗을 뿌려 가꾸며 정자를 지어 정과정이라 불렀다. 찾는 이 없어 무료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지만 언젠가 유배에서 풀릴 수 있을까 봐 스스로 달래며, 정자에 올라 거문고를 켰다. 그리고 노래지어 불렀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자기의 곧은 절개는 변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심경을 노래하였다.
정서가 귀양에서 풀려난 것은 1170년 10월 무신 난이 일어나 의종이 거제도 둔덕으로 유폐되고 명종이 즉위한 해였다. 후세 사람들은 정서가 정과정 정자에 올라 거문고 타며 부른 노래를 ‘정과정곡’이라 하였고, 그 정과정으로 흐르는 수영천을 과정천(瓜亭川)이라 했다 한다. 유배지에서 신하가 임금을 그리워하며 절실하고 애달프게 노래하였다 하여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로도 널리 알려졌다. 궁중에서는 속악(俗樂) 악장으로 채택되었고, 기녀(妓女)는 물론 사대부 간에도 널리 불리고 학습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시대 정철(鄭澈)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과 더불어 ‘연주지사’의 원류가 된다. 문학의 형식으로는 10구체 단련(單聯)으로 되어 있고, 악곡상으로는 속악에서 가장 빠른 템포인 ‘삼진작(三眞勺)’으로 모두 11개의 악절로 나뉘어 불렸다.
정과정곡은 향가(鄕歌) 혹은 향가 잔존 형태로 분류된다. 조선조 때는 궁중아악으로 연주되면서 악공 선발시험에는 필수 곡목으로 연주하는 가곡이 되어 노래의 품격을 높였다.
■ 노래비와 정과정 정자도 세워
정과정 터, 정서가 동래에서 유배 생활을 한 장소는 어디쯤일까. ‘동국여지승람’에서는 ‘在縣南十里’라 기록하고 그 유래를 밝히고는 정과정에 관한 인물과 노래의 애절함을 한시(漢詩)로 표현한 이제현(李齊賢) 정추(鄭樞) 한수(韓修) 유숙(柳淑) 이숭인(李崇仁)의 시들을 싣고 있다.
정과정의 위치를 현(동래현)에서 십 리 남쪽에 있다는 ‘동국여지승람’이나 ‘동래부지’의 기록으로는 요즈음 지도에서 찾기가 막연해 보이지만, 현재의 지형을 통해 옛 자리를 추측해 본다. 연산9동 끝자락 망미주공아파트와 망미2동 대림e편한세상아파트가 만나고 수영하수처리장을 지나 온천천이 수영강과 만나는 지점, 이곳의 옛 마을은 섬안마을, 독도(獨島)마을로 불렸다. 수영강이 흘러내리면서 만든 모래톱 위에 솟아 있는 언덕이 마치 섬처럼 보였기 때문이란다. 이 마을에서 동래 쪽으로 기울어진 곳이 정과정 터로 예부터 알려졌다.
연제구는 이 일대 주변의 도로명을 과정로로 지정하고 옛터를 기리고 있다. 행정지명이야 근교 주민의 변동에 따라 그 이름이 바뀌고 한때는 잊히기도 한다. 동래의 옛 어른들은 그곳에서 어릴 적 멱 감고 고기도 잡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1971년 부산교육대 부속 초등학교 학생들이 ‘정과정 옛터’란 표지석을 세웠고, 1984년에는 ‘정과정 시비’도 세웠다. 이 두 비가 세워질 당시 비석이 선 자리 아래가 바로 수영강이었다. 그러나 수영하수처리장이 세워지면서 강 주변이 매축되고 이 비석들도 한동안 부산박물관에 보관되다가 지금은 수영하수처리장 옥상의 체육공원으로 옮겨졌다. 1985년 토향회(土鄕會)와 정과정시비건립추진위원회가 망미동 산 7번지에 ‘정과정 시비’를 세우고 정과정이란 편액을 단 큰 정자도 지었다. 그 옛날 정서가 유배 살며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요배한 곳이라 전해지는 자리이다.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
※ 공동기획: 부산연제구·국제신문·(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