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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기상 나팔에 눈 뜨면…밤새 또 수십 명이 죽어나갔다

제7포로수용소- 거제리 포로수용소(팩션)

이야기 공작소- 도란도란 연제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1-16 19:14:34
  •  |  본지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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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바람이 할퀴는 천막 안 맨땅
-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자다가
- 해뜨면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포로들
- 전염병 때문이거나 살해됐거나
- 무슨 변고가 생긴 게 틀림없다

- 전쟁 끝날 기미없이 지속되자
- 포로들은 부산으로 후송되고
- 수용소는 굶주림과 이념투쟁

- 지옥같은 참극은 언제 끝날까
- 어머니를 다시 만날 희망만이
- 하루하루를 버티는 힘이었다

자정 무렵 천막 안으로 플래시 불빛이 번쩍였다. 미군용 플래시를 들고 나타난 사람은 새로 여단장이 된 차광호였다. 다들 차광호의 발소리에 숨을 죽이고 누워 있었다. 힘든 부두 노동으로 깊은 밤잠에 빠져들 시간이긴 했지만 차광호의 인기척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막사 안에 누워 있는 포로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비춰보았다. 고개를 돌리거나 엎드려 있는 사람은 몽둥이로 건드려가며 확인했다. 차광호 뒤에는 도끼와 칼을 든 그의 일당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무기는 노동을 나갔다가 드럼통을 몰래 잘라와 만든 것이었지만 사람을 죽일 만큼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차광호가 막사 중앙에 누워 있는 내 쪽으로 점점 다가왔다.

   
6·25전쟁 당시 지금의 부산시청 일대에 전쟁 포로를 수용했던 거제리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사진은 1958년 부산수용소에서 죄수를 석방하는 모습이다. 부산에 있던 전쟁 포로는 1951년 상반기 경남 거제도로 이송한 까닭에 거제리 포로수용소 관련 자료는 많지 않다. 부산역사문화대전·‘칼라로 만나는 1954년 코리아’ 제공
‘쿵! 쿵!’

차광호가 내 옆에 자고 있던 김학봉의 머리를 툭툭 쳤다. 김학봉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이! 대대장 동무, 나 따라오라.”

잠결에 정신을 차린 김학봉은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슬며시 눈을 감은 채 동정을 살피던 나와 김학봉의 눈이 마주쳤다. 김학봉은 내 왼손을 슬쩍 잡았다 놓고서는 차광호 일당을 따라 막사 밖으로 나갔다. 나는 김학봉이 염려되었지만 달리 도와줄 방도가 없었다. 며칠 전 새로 여단장이 된 차광호는 제7 포로수용소 안에서 저승사자로 불렸다. 그는 낙동강 전선에서 고립돼 포로가 된 장교 출신이었다. 수용소 안에서 만난 부대원들과 밤사이 제7 포로수용소 여단장을 제거했다. 그러고는 미군에게 공석인 여단장을 맡겨달라고 요구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미군은 수용소마다 여단장, 대대장, 중대장 등 군대식으로 편제를 조직해 관리했다. 포로 간부는 주로 대학 출신자를 뽑아 자체적으로 운영을 맡겼는데 누가 간부를 하든 큰 관심이 없었다. 낮에는 노동을 나가 미군과 한국군의 감시하에 놓였지만 날이 저물어 포로수용소로 돌아오면 수용소 안은 간부들의 천하가 되었다. 김학봉은 열아홉 살로 나와 동갑이었으며 평안남도 순천 출신이었다. 평양공업대학을 다니다 전쟁이 터지자 나처럼 강제 징집되어 미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는 유순한 성격으로 애당초 군인이나 대대장을 할 만한 기질이 못되었다. 포로를 관리하는 토마스 중사가 장교 출신이나 대학 출신자는 손을 들라고 했을 때, 그는 단지 나보다 앞줄에 서 있었기 때문에 대대장이 된 것뿐이었다. 시간이 한참 흘러도 김학봉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김학봉의 모포를 슬그머니 챙겨두었다.
   
사진은 6·25 전쟁 무렵 수영비행장.
1950년 8월 20일, 나는 평양에서 의과대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민주청년동맹이라는 단체가 갑자기 나를 붙잡고 평양 제1 여고로 데리고 갔다. 학교 운동장에는 이미 많은 학생이 모여 있었다. 민주청년동맹 위원장은 강단에 올라가 학업을 중단하고 우리 모두 조국 통일의 위업에 동참하자며 인민군 입대지원서를 나누어주며 손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누구도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신체검사를 받으러 군관학교로 이동하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어머니와 여동생이 학교 정문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시오. 한두 달 뒤면 꼭 집으로 돌아오겠소. 그리고 나는 의대생이라 병원 쪽에 투입되면 안전할 테니 너무 염려 마시오.”

어머니는 미리 준비해 온 떡을 내게 건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때까지도 나는 남쪽의 자세한 전황을 몰랐다. 북조선 정부에서는 낙동강까지 내려간 인민군이 곧 통일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1950년 10월 16일, 평양 인근의 제1 군관학교에서 지휘관 교육과 전술 교육을 받고 있던 우리는 오전 1시경에 느닷없이 야간행군을 한다며 뒷산으로 올라가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다음 날 새벽, 참호가 완성되어 경계를 서고 있는데 산 아래에 인민군들이 새카맣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여명이 밝아오는 논밭 위에 너덜너덜한 군복을 입은 수천의 인민군이 총과 배낭만 멘 채 무질서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정신없이 북쪽을 향해 뛰어가는 병사들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부산 거제리 임시 포로수용소 전경. 부산역사문화대전 제공
1950년 10월 19일, 미 공군 전투기 수십 대가 평양 상공에 나타났다. 전투기들은 네이팜 탄과 기총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미군의 공습으로 참호가 무너졌다. 지휘 계통이 마비돼 혼란을 틈탄 병사들이 하나둘 소속 부대에서 이탈했다. 나도 집이 있는 평양 시내 쪽으로 도망쳤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땅 위를 뛰어가던 사람들이 전투기가 저공비행으로 기총사격을 퍼부을 때마다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나는 하천 옆 구덩이에 몸을 숨기고 미군의 공습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하천 건너편 논둑으로 여동생이 뛰어가는 게 보였다. 뒤편에는 공중에서 선회한 전투기 한 대가 맹렬한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나는 목청이 터질 듯 여동생을 부르며 튀어 나갔다. 여동생이 내 목소리를 듣고 힐끗 돌아보는 순간 기총사격에 난자당한 여동생의 몸에서 핏줄기가 솟았다. 나도 총알을 맞고 하천으로 굴러떨어졌다. 지면에 바짝 붙어 저공으로 비행하던 조종사가 씨익 웃었다. 다음날 미군은 평양을 완전히 점령했다. 북조선 정부와 군 수뇌부들은 10월 12일에 평양에서 빠져나갔다.

   
밥 짓는 모습.
깨어보니 나는 미군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총알은 내 왼쪽 다리를 스치고 지나 상처가 크지 않았다. 미군은 포로들을 짐승 다루듯 “하바, 하바”라고 외치며 대동강으로 끌고 갔다. 우리는 대동강 가교 공사에 동원되었다. 6일 동안 물 한 모금 밥 한 끼 주지 않았다. 살이 빠져 뼈가 앙상하게 드러났다. 추위와 배고픔에 매일 수십 명이 쓰러져 죽었다. 학교와 집이 눈앞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나는 평양형무소에 갇혔다. 어느 날 밤 우리는 갑자기 기차에 올라탔다. 형무소에서 빠져나올 때 한쪽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그곳은 부상병들이 수감된 곳이었다. 미군은 포로들을 인천으로 옮겼다. 우리는 대형 화물선에 탔다. 몇 십 명이 사다리를 타고 갑판에서 화물칸으로 내려가다가 기력이 없어 떨어져 죽거나 다쳤다. 수천 명이 캄캄하고 비좁은 화물칸에 들어앉아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열기와 악취로 곧 질식할 것 같았다. 다음 날 화물칸으로 밥이 담긴 드럼통 하나가 밧줄에 매달려 내려왔다. 굶주린 포로들이 일제히 드럼통으로 달려들었다. 수십 명이 깔려 죽었다. 밥이 내려올 때마다 사람들이 그렇게 밟혀 죽었다. 나흘 뒤 배가 부산항에 정박했다.

외국으로 끌려갈 줄 알았던 포로들은 한글 간판을 보고서야 안도했다. 여름 군복을 입고 있어서인지 12월 하순 부산의 기온은 굉장히 매서웠다. 나는 거제리 제7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산지로 둘러싸인 평지에 대형천막 수백 동이 세워져 있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부산으로 후송된 포로의 숫자가 10만 명이 넘어섰다고 했다.

나는 4대대에 배치됐다. 칼바람 할퀴는 천막 안에서 차가운 땅 위에 가마니를 깔고 포로들은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눈을 붙였다. 아수라장 같았던 화물칸과 비교하면 편안했다. 멀리 시내 쪽에서 교회 종소리가 들렸다. 지금껏 내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기상나팔이 울리자 포로들이 하나둘 천막 앞으로 기어 나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김학봉을 찾을 수 없었다. 변고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다들 가져나온 담요를 허리에 두르고 해뜨기만을 기다렸다. 새카만 얼굴에 곯을 대로 곯은 포로들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배식조가 취사장에서 밥이 담긴 드럼통을 가져왔다. 포로들이 드럼통 앞으로 길게 줄을 섰다. 나도 담요 한 귀퉁이에 밥을 배급받았다.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되어가건만 미군은 담요 한 장 외에 어떠한 물품도 지급하지 않았다. 나는 천막 앞쪽에 웅크리고 앉아 담요에 받은 안락미를 핥아먹었다. 입으로 후후 불면 밥알이 담요 위에 굴러다녀 포로들이 훌랄라 밥이라 불렀다. 한 움큼 받은 안락미로는 당최 허기가 가시지 않았다. 거기다 구정물로 밥을 짓다 보니 늘 고약한 냄새가 났다. 나는 밥을 먹자마자 변소로 달려갔다. 이틀 전부터 밥을 먹으면 피똥을 쌌다. 이질 증상 같았다. 수용소에서는 이질, 장질부사, 폐렴 같은 전염병이 돌아 매일 수십 명이 죽어 나갔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병이었는데 다들 허약해져 가벼운 질병에도 생명이 위태로웠다. 천막 끝 변소 앞에는 아침이면 수백 명이 줄을 섰다. 웅덩이를 수십 개 파놓은 땅에 나무 사다리를 걸치고 그 위에 올라가 용변을 보았다. 인원이 많다 보니 변소 감시원이 통제를 했다.

“바지 벗어. 발사.”

변소 감시원들은 3, 4분이 지나면 용변을 끊고 일어서라고 닦달했다. 그러고는 다음 조가 올라가 똥을 쌌다. 나는 일어서라는 감시원의 불호령에도 설사가 멈추지 않아 그대로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난 감시원이 군홧발로 내 등을 걷어찼다. 나는 똥구덩이 속으로 고꾸라졌다. 다행히 양팔로 몸을 지탱해 큰 수모는 면했다.

그런데 똥구덩이 속에서 뭔가 물컹거렸다. 둥근 물체가 똥물에 떠올랐다.

“…으…으!”

목이 잘린 김학봉의 머리였다. 나는 김학봉의 얼굴을 보고 기겁했다. 감시원이 포로들에게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 감시원도 차광호 일당 중 한 명이었다.

부두 노동을 나가기 전 토마스 중사가 와서 인원 점검을 했다. 차광호가 나서서 4대대장 김학봉이 새벽녘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토마스 중사가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 대학생 있나?”

몇몇이 손을 들었다. 그중에 어젯밤 보았던 차광호 일당도 끼어 있었다. 간부직을 죄다 장악하려는 차광호 일당의 속셈이 보였다. 간부가 되면 작업을 나가지 않아도 되고 수용소 안에서 환경정리와 취사 등을 맡으며 편하게 지냈다. 나도 손을 들었다. 토마스 중사가 앞줄에 서 있던 나를 보고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토마스 중사는 “굿”이라며 따라오라고 했다. 일반 포로들은 부두의 미군 화물선으로 시레이션과 군수품 하역작업을 하러 나갔다. 나는 토마스 중사를 따라 수용소 본부로 갔다. 등 뒤에서 차광호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다. 토마스 중사는 나에게 포로들의 한글 명단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켰다.
예상대로 밤이 되자 차광호 일당이 나를 찾아왔다. 차광호는 몽둥이를 들고서 천막 밖으로 나오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차광호를 따라 변소 쪽으로 갔다. 차광호는 나에게 자신의 계획에 동참하면 해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차광호는 일반 포로들을 장악해 쿠데타를 일으킨 뒤 미군 병기들을 탈취해 부산을 점령할 계획이라고 했다. 나는 차광호를 쳐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러고는 뒤쪽을 가리키며 “경비!”라고 외치면서 수용소 본부 쪽으로 냅다 뛰었다.

쏜살같이 달아나는데 등에 큰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차광호 일당이 던진 도끼에 등을 맞았다. 겨우 수용소 본부까지 뛰어온 나는 정신을 잃었다. 차광호의 계획은 허황했다. 수영비행장과 부두에서 본 미군의 전력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는 먼 타지에서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야전병원에 누워 있었다. 옆 병상에 포로 번호 一○三六五五라는 인쇄 줄을 차고 누워 있던 사람이 나를 보고 환히 웃었다. 병상 머리맡에 붙은 하얀 카드를 보니 영문으로 김수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제 일어났구려, 당신 3일 동안 잠만 잤어. 하하하.”

그는 도쿄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돌아와 문학으로 전향해 지금은 시를 쓰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이 인민군이 아니며 강제로 징집당해 북으로 끌려갔다가 총까지 맞고 잡혀서 포로가 된 거라며 억울해했다. 나는 한참 그의 사연을 듣고 있다가 손에 들고 있는 그의 성서를 보고는 궁금해서 물었다.

“신은 인간이 왜 이런 지옥 같은 참극을 벌이는지 아시오?”

김수영은 포로수용소 쪽을 내다보면서 한참 생각에 잠겼다. “우리 인간을 더욱 단련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전쟁이 장기화하자 부산으로 후송된 포로들은 배고픔을 해결하려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다가 그것이 어느 정도 해결되자 이념투쟁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차광호의 계획을 거절한 건 죽은 김학봉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집에 돌아가고 싶은 일념 때문이었다. 수용소 본부에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 곧 부산의 대규모 포로들을 거제도로 이송한 뒤 전쟁이 끝나면 북으로 송환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를 만날 희망에 부풀었다.

강성민 소설가

※ 공동기획:국제신문·부산연제구·(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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