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메디클럽

걷고 싶은 길 <59> 사천 은사 선비길

벼슬도 마다한 은둔 선비들… 난세 걱정하며 거닐던 오솔길 3㎞

  • 국제신문
  • 이완용 기자 wylee@kookje.co.kr
  •  |  입력 : 2018-12-09 20:01:49
  •  |  본지 10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 옛자취 잇는 길 시작은 은사마을
- 평창 이씨 350년 집성촌 이뤄
- 옥동마을 등 거쳐 회귀하는 코스
- 사집봉·성성대 등 선현들 흔적
- 세종 태실지로 택할 만큼 명당

선비는 세상이 어지러우면 벼슬도 사양하고 진흙탕을 비켜나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난세가 침잠하기를 기다렸다. 한두 해가 아니라 평생이어도 그랬다.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隱士)마을은 등과(登科)를 싫어하는 선비들이 은둔하여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난세는 아니어도 이곳에서 은거하며 뜻을 세운 평창 이씨가 350여 년을 살아온 집성촌으로 사집봉(士集峰), 성성대(省省臺), 유청산(儒廳山), 의숙대(誼塾臺) 등 곳곳에 선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잘 다듬어진 관광형 길이 아니라 시골의 여느 오솔길과 별 차이는 없지만, 선비의 숨결을 느끼며 조용하고 차분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은 걷기 마니아에게 권하고 싶은 길이다.
   
옥동마을의 들판 가운데 자리한 우람한 숲 사이로 들어가면 단종 태실지가 나온다. 일제가 부지를 매각한 탓에 친일파의 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초입부터 선비 흔적 묻어나는 길

진주에서 하동과 연결되는 국도 2호선의 곤명면 원전마을에서 옥종면 방향으로 4㎞를 달리면 오른쪽에 ‘범죄 없는 은사마을’이란 표석이 있다. 선비길은 여기서 시작이다. 마을 입구에 ‘은사동 도원곡’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이 마을이 중국 도연명의 시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이라는 의미다. 글씨는 이 마을 출신인 이현수 전 국회의원의 장인인 윤길중 제11대 국회부의장이 썼다. 여기서 100여m를 걸어가면 오른쪽에 아름다운 은사마을이란 뜻의 정자 ‘가은정’이 있고 맞은편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 형상의 조형물이 있다.

■오솔길 남아 있는 한적한 길
   
마을 앞 다리를 지나 오른쪽의 하천 둑길을 따라 걸었다. 길가에는 콩이나 들깨를 타작하고 남은 부스러기가 쌓여 있다. 추수를 끝낸 들판을 바라보니 시골 냄새가 물씬 풍겼다. 집집마다 있는 감나무에 빨갛게 익은 감이 아직 매달려 있고, 까치와 직박구리가 연신 홍시를 쪼아댔다. 꼭 고향에 온 듯 포근한 풍경이다.

이 마을에서는 대부분 논농사를 짓지만 들판 한쪽에는 비닐하우스와 블루베리 농장도 있다. 은사마을 끝에서 윗마을인 정골마을 입구까지 500여m는 자동차가 다니기 어려울 만큼 좁은 옛길 그대로였다. 정골마을 입구 부근 100여m는 사람이 다니는 길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눈치껏’ 길을 찾아야 할 구간이다.

정골마을에 들어서면 좁은 길을 따라 한쪽으로 집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스무 가구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은 조용하고 한적하다. 가끔 요란하게 짖어대는 개들이 사람 사는 동네임을 알려준다. 이 집 저 집을 내 집처럼 쳐다보며 걷다 보니 마을 뒤 야트막한 고개에 다다랐다. 이 고개를 넘으면 옥동마을이다. 울창한 밤나무와 메타세쿼이아 사이로 난 시멘트 길을 따라 잠시 걸었는데 너른 개활지다. 10여 분을 둘러보다 오른쪽 들판 아래로 봉긋한 소나무 숲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남도 기념물 31호로 지정된 단종 태실지다.

■세종과 단종의 태실지가 백미

   
은사교구 옆에는 100여 년생 느티나무 아래 쉼터와 ‘마을유래비’, 가은정이 있다.
세종은 손자의 태실을 자신의 태실과 가까이 두려고 이곳에 안치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왕조의 정기를 끊는다며 경기 양주로 옮기고 부지를 매각했다. 지금은 일본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지낸 자의 묘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도 환수하지 못한 땅이다. 화려한 친일인사 묘 주위에 석물 몇 개와 안내판이 태실임을 말해주는 게 고작이다. 사천시와 문화재 관리단체가 친일인사 묘를 관리하는 모양새여서 씁쓸하다.

단종태실지에서 500여m를 더 가면 세종대왕태실지가 나온다. 애초 야트막한 산 정상에 태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옮겨지고 일부는 훼손돼, 남은 것이라고는 석물 20여 개가 전부다. 그것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산 한쪽 귀퉁이에 모아 철책을 둘러놓은 정도다. 매년 10월 중순에 사천시 다인회에서 헌다례를 올리는 것이 유일한 추모 행사라고 하니 안타깝다.

주차장 옆에 서 있는 안내판은 일 년이 넘도록 ‘정비작업 중’이며 방치돼 있음을 알려준다. 당시 왕실이 세종의 태실을 설치하기 위해 태실도감을 두고 전국의 길지를 찾다가 한양에서 이곳까지 왔다. 그 정도로 명당이며 길지라는 말인데, 지금 모습은 세월의 흐름인가 싶다.

세종 태실지에서 삼정마을 쪽으로 하천을 따라 200여m를 가면 곤양군수 어득강이 태실지를 살피고 난 뒤 지역 유림과 시를 짓고 담론했다는 고반대(考盤臺)도 있다. 나중에 지역 유림이 계(契)를 만들고 해마다 시회(詩會)를 열었는데, 지금은 명맥조차 이어지지 않고 있다. 세종대왕태실지에서 처음 시작했던 은사마을 입구로 내려오는 1㎞의 길은 농로를 따라간다. 아스팔트의 차도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농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골길이 더 정겹다.

은사마을에서 만난 이재극(77) 씨는 “길이 다듬어지지 않아 불편할지 모르지만, 마을 구석구석에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며 “선현들 행적을 그리며 하루를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코스로는 제격이다”고 말했다.

이완용 기자 wylee@kookje.co.kr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많이 본 뉴스RSS

  1. 1[펫 칼럼] 구포 개시장 폐업…생명존중 시대 첫발
  2. 2[신간 돋보기] 박람회 실무 전문 ‘가이드 북’
  3. 3뒷다리 마비…시간 정해 압박 배뇨·배변 해줘야
  4. 4신항 2-5부두 운영사로 통합법인 가닥
  5. 5조국 파면 부산시민연대 20일 서면서 첫 촛불집회
  6. 6법무부, 검찰국장·기조실장에 검사 배제…검찰은 조국 정조준
  7. 7가을태풍 또 온다…주말 한반도 접근
  8. 8[신간 돋보기] 정치권 과하거나 모자람 꼬집기
  9. 9BPA, 무역항 기능 상실한 다대부두 ‘친수공간 개발’ 본격화
  10. 10의장선거 앞두고 동료끼리 금품수수 전직 사상구의원 4명 2심서도 징역형
  1. 1나경원 AFP 기사 어떤 내용? 조국 법무부 장관 자녀 논란과 비교도…
  2. 2'라치몬트 산후조리원' 실검에 나경원 "대응가치 없다"
  3. 3하태경 직무정지 6개월…바른미래發 정계개편 나비효과 되나
  4. 4부산, 명실상부한 블록체인 특구로 자리매김하나
  5. 5문재인 대통령 국정지지율 ‘역대 최저’ 43.8%… 서울·30대 민심 잃어
  6. 6'2019년 EBS입시설명회' 부산 사상구에서 첫 개최
  7. 7연제형 교육 생태계 구성을 위한 정책공감 교육 개최
  8. 8조국 파면 부산시민연대 20일 서면서 첫 촛불집회
  9. 9법무부, 검찰국장·기조실장에 검사 배제…검찰은 조국 정조준
  10. 10연산8동, 한양류마디 병원에서 ‘찾아가는 생생정보 마당’ 운영
  1. 1신항 2-5부두 운영사로 통합법인 가닥
  2. 2BPA, 무역항 기능 상실한 다대부두 ‘친수공간 개발’ 본격화
  3. 3 연구개발을 성장 동력으로
  4. 4미국 연준 금리 또 내렸다…한은도 이르면 내달 인하 가능성
  5. 5지역 소상공업체 100곳 힘 모아 기장미역 넣은 ‘부산 라면’ 개발
  6. 6부산항, 글로벌 항만 협력 네트워크 추진
  7. 7OECD, 올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 2.1%로 하향
  8. 8“부산 올해 김 채묘 가장 적절한 시기는 내달 초”
  9. 9천리안위성 2호 활용 해양 및 환경 감시, 전문가들 머리 맞대
  10. 10두산중공업, 세계 5번째 발전용 가스터빈 독자모델 개발 눈앞
  1. 1‘청주 처제살인 사건’ 이춘재, 범행 수법도 일치…“스타킹에 묶어”
  2. 2태풍 타파 이동경로, 한반도 관통하나…“주말 폭우 쏟아진다”
  3. 3이춘재, 부산교도소 생활 충격 증언 “1급 모범수…일반수용자라면 가석방 됐을 것”
  4. 417호 태풍 ‘타파’ 한국이나 일본으로 향해... 주말날씨 관심 몰려
  5. 5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검거에 유영철 발언 화제..."그렇지 않다면 살인 못 멈췄을 것"
  6. 617호 태풍 '타파' 한반도 지나나?...주말 남부지방에 폭우 예상
  7. 7화성연쇄살인사건·살인의 추억 범인 특정… “봉준호가 본 그 사람일까”
  8. 8제17호 태풍 '타파' 발생…일요일 대한해협 부근 지날 듯
  9. 9‘창원 용원동 뺑소니’ 외국인 운전자, 사고 당일 카자흐스탄 귀국
  10. 10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혐의 부인, 경찰 "신상 못 밝혀…"
  1. 1양준혁 “자연스러운 만남과 이별이었다”…성 스캔들 법적 대응 예고
  2. 2로이스터 감독 복귀 유력…롯데, 새 사령탑 후보 공개
  3. 3토트넘VS올림피아코스 예상 선발 라인업…손흥민 연속 골 터뜨릴까?
  4. 4양준혁, 성추문에 강경대응 예고..."내 발자취에 대한 모욕"
  5. 5강병규 양준혁 뿌리깊은 악연 재조명 “양불신님”
  6. 6사이영상, 류현진으로 기울어지나…셔저, 6⅔이닝 5실점 부진
  7. 7로이스터 10년 만에 컴백? 롯데, 감독 후보로 찍다
  8. 8손흥민의 시간은 단 20분…공격 포인트 불발
  9. 9또 난타당한 셔저…NL사이영상 혼전
  10. 10또 만리장성 못 넘고…남자탁구, 아시아선수권 단체 준우승
우리은행
신중년이 뛴다
꽃중년, 나이의 벽을 깨다
해피-업 희망 프로젝트
분리불안 증세 지현 양
  • 골든블루배 골프대회
  • 2019맘편한부산
  • 지역경제 살리기 정책 콘퍼런스
  • 기장캠핑페스티벌
  • 제21회부산마라톤대회
  • 엄홍길 대장 시민초청 강연회
  • 2019국제에너지산업전
  • 2019 ATC 부산 성공기원 시민대회
  • 2019아시아 트레일즈 컨퍼런스
  • 사하관관사진공모전
  • 유콘서트
  • 어린이극지해양아카데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