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 출신 예술가가 개인 작업실을 개조해 예술가 위한 전시·교육공간 난 강변미술관 설립
- 자연과 어우러진 숲속 미술관…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

태국 방콕은 동남아와 남아시아 그리고 오세아니아로 여행을 갈 때 중간 기착지로 자주 들르는 곳이다. 난(Nan)으로 가게 된 것도 방콕 카오산로드 게스트하우스 게시판에서 우연히 읽은 포스트잇의 ‘사원과 예술의 도시’라는 글귀 때문이다.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에서 내린 난 공항에는 호객꾼의 고함소리는커녕 택시나 뚝뚝(Tuk Tuk)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난 강변 미술관 야외에 전시한 그림.

공항에서 출발하여 약 4km에 이르는 강변까지 걸어가면서 낯선 사람들과 익숙한 풍경을 만난다. 그 사람들은, 1931년 태국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미얀마 및 라오스 접경 지역의 산간 오지에서 폐쇄적이고 자치적으로 살아온 도시의 역사만큼이나, 태국 여행에서 흔히 만나는 모습은 아니다. 그 모습은 머리 가장자리를 깎아 꼭대기 부분에만 머리카락을 남겨놓고 큰 터번을 쓴 흐몽(Hmong)족 남자, 직물이나 편물 가방을 들고 사롱(sarong 허리둘레를 겹겹이 감아서 입고 있는 큰 튜브 같은 치마)에 묶은 긴 팔 블라우스를 입은 카무(Khamu)족 여성, 오색찬란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장신구를 두른 야오(Yao)족 여성 등이다.

■시내엔 많고 많은 사원이

난 강변 미술관 전경.

낯설고 신기한 모습에서 고개를 돌리면 친숙한 불교 사원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이렇게 많은 사원을 앞에 두고도 망설임 없이 발걸음은 숙소부터 찾아간다. 1368년 난타부리(Nonthaburi) 왕국에 의해서 도시로 건설되기 전부터 건립되는 사원들은, 태국의 여느 불교사원과 같이 부처를 모시고, 그 일생의 이야기를 벽화로 그린 자타카(Jataka)로 되어 있으리라는 선입견이 앞서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두 시간쯤 걸어서 찾아간 곳은 시내 중심지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다. 별이 손에 잡힐 듯 더 가까이 다가서면서 깊어가는 밤,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이곳의 피자(pizza)와 함께 주인이 건네준 와이어트(D.K.Wyatt)의 ‘난 역사의 신비주의 1320~1598년(NAN History of Mysticism AD1320-1598)’로 아침을 맞이한다.

이른 새벽,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고 하듯이, 깨달은 분 붓다(Buddha)와 그의 일생 자타카(Jataka)가 아니라 깨닫지 못한 중생을 보고자 운동화 끈을 묶는다. 시내의 그렇게 많은 사원을 돌면서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여준 곳은 황금 불탑(Chedi)에 코끼리 상이 많아 코끼리 사원으로 불리는 왓 프라 탓 창캄(Wat Phra That Chang Kham, 15세기 초 건립)과 도시를 대표하는 왕실 사원 왓 푸민(Wat Phumin, 1596년 건립)의 벽화들이다.

■사원 벽화 속 풍속과 일상

왓푸민 사원의 벽화 ‘속삭임’은 난의 상징이 됐다.

사원 벽화가 흥미롭게 보여주는 것은 당시 도시의 풍속과 일상생활이다. 서양 상인들과 증기선, 공을 가지고 노는 남자와 옷감을 짜는 여자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춤추는 여성들을 둘러싸서 지켜보고 있는 남녀들, ‘속삭임(The Whispering)’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남녀의 모습- 짙은 화장을 한 여인에게 상반신을 드러낸 채 귓속말로 속삭이는 남자, 상반신을 드러낸 여인의 뒤에서 한 손으로 젖가슴을,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싸고 있는 남성, 그리고 모이를 먹으려고 몰려다니는 오리, 닭 등 날짐승 무리와 나무 위에서 성행위를 하는 원숭이들. 사원 벽화는 도시 외곽 타이 루 족의 마을에 있는 왓 농부아(Wat Nong Bua, 1862년)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사원 벽화들은, 라마 5세 출랄롱코른(Chulalongkorn) 왕의 통치 시기(1868~1910년)에 난 푸아판(Nan Puaphan, 생몰연대 미상)을 중심으로 중국 운남성 십송파나(Sipsongpanna) 출신의 이주민 타이계 루 족(Tai Lu)이 복원한 것이다. 그 복원으로 ‘속삭임’은 도시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복원에 그치지 않고 벽화가 푸아판을 중심으로 한 예술 창조 정신을 계승하고 사원 벽화를 재창조하기 위하여 ‘난 강변 미술관’(Nan riverside art gallery)에 상설전시관이 2009년 12월 개관된다.

■강변 미술관에선 예술이 순환되고

춤추는 무희와 구경꾼을 그린 사원벽화.

미술관은 이 지역 출신 예술가 윈나이(Winai Prabripoo, 1954년생)가 개인 작업실을 개조하여 예술가들에게 전시공간을, 예술가 지망생에게 교육 공간을 제공하고자 강변에 넓은 정원을 가진 전통 가옥으로 바꾼 것이다. 미술관은 저만치 흘러가는 강물, 숲과 나무로 뒤덮인 강변의 비탈진 언덕, 다양한 목조 조각들과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려서 만든 목공예들이 서 있는 정원,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야생화들, 전통 가옥들이 서로 어우러져 자연을 이루고 있다.

미술관 1층은 예술가들의 다양한 예술작품, 그림이나 조각, 도자기 등으로, 2층은 사원 벽화의 상설 전시관과 그 벽화를 재구성한 그의 미술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미술관을 둘러보고는 방문객은 강을 바라볼 수 있는 숲속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예술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세계로 들어가고자 환각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미술관을 떠나 탐파툽(Tham Pha Tup) 국가 삼림공원을 거쳐서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자연과 어우러지는 전통 가옥의 미술관, 지역 예술의 계승과 재창조, 예술지망생들의 교육’ 그리고 ‘내 고향 부산의 미술관들’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민병욱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 bmw@pusa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