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래성 남문 어귀에 자리 잡은 주막
- 보부상 박 행수는 등짐을 고쳐맸다
- 이번 행선지는 초량의 왜관개시
- 막 나서는데 바깥이 시끌벅적이며
- 왜관가는 동래부사 행렬이 이어지자
- 출발을 접고 하룻밤 묵기로 했다

- “남문구 횃바지는 어찌 변할 것 같소”
- 술 기운에 불콰해진 박 행수가 묻자
- 주모가 미래를 내다보듯 대꾸했다
- “200년쯤 뒤 교통 요충지가 될 거요”

1800년대 말, 화사한 봄날의 동래 남문구(南門口) 주막. 박 행수(行首)의 콧등이 시큰하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어젯밤 마신 막걸리가 과했던가. 나이 오십 고개를 넘기고부터는 여독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한양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상주 대구 청도 밀양 양산을 거쳐 동래까지 냅다 걸었으니 무쇠 다리인들 배겨날 텐가. 청도 납딱바위에서 한나절을 쉬었는데도 몸이 예전같지 않다. 납딱바위에서는 동래에서 올라온 대구의 보부상을 만났다. 동래성이 요즘 무슨 행사 준비로 어수선하다는 전갈. 납딱바위는 넉넉한 그늘과 시원한 샘물이 있어 전국의 길손들이 쉬어가는 휴식처다. 영남대로 천리길, 이 먼길을 오르내린 지도 벌써 20년이다. 길에 흘린 땀과 애환을 등짐에 지운다면 열짐은 넘을 터. 그것이 길이었다. 길은 땀과 눈물을 흘리게 하고, 밥과 살림을 안겨주었다. 살려고 하면 어디든 길은 있었다.

동래부사접왜사도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쾌청한 날씨다. 강물은 옥빛이요 바다는 갈맷빛이다. 금정산의 앞 이마가 훤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초량 바닷가의 왜관(倭館)까지 가야 한다. 큰 장사를 하려면 왜관 개시(開市)가 최고였다. 동래상인들의 텃새를 이겨야 하고 동래부의 통제를 받긴 하지만, 거래를 트고 나면 이문이 쏠쏠하고 추후 거래까지 가능했다. 17~19세기 조선·일본 두 나라 사이의 무역은 동래 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무역은 크게 공무역, 사무역, 밀무역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 동래상인들과 보부상들은 동래부의 허가를 받아 사무역을 담당했는데, 왜관의 개시대청에서 이루어져 흔히 ‘개시’라 불렸다.

왜관 개시는 한양 보부상들에게도 인기였다. 천리길을 걸어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왜인들과 거래하는 이유는 이문도 이문이지만, 왜관이라는 특별구역을 구경할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왜관에서는 매월 3일, 8일에 개시가 열렸다. 왜인들은 은전을 갖고와 조선 물건을 사 갔다. 박 행수는 등짐에 담아온 물건을 다시 살폈다. 중국산 비단실(白絲)과 조선산 인삼이 가득했다. 왜인들은 조선 인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했다. 박 행수의 얼굴에 가벼운 웃음이 번졌다.

여기가 어딘가. 박 행수가 허리춤에서 손바닥만한 크기의 조선팔도노정기(朝鮮八道路程記)와 도리도표(道里圖標)를 꺼내 방향을 가늠한다. 도리도표는 조선 순조 연간에 제작된 8도 전도다. 주요 국도의 경로와 거리표, 각 도별 이정표가 나와 있어 행정관청은 물론 일반 여행자에게도 필수 소지품이었다.

큰 제방이렷다. 거제(巨堤). 어디에 큰 제방이 있다는 것인가. 지금의 거제리는 일제강점기 동래천(온천천)에 큰 제방을 쌓고 넓은 벌판을 만든 다음에 붙인 지명이라는데, 그건 미심쩍다. 고문헌에는 ‘거제는 동래군 서면(西面) 거벌리(居伐里)라 하였다. 거벌(居伐)은 거벌(巨伐)로도 표기되어 ‘큰 벌판’을 의미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오히려 이게 마뜩하다. 거제란 말의 족보를 따라가면 뿌리가 있다는 말이겠다.

그보다는 남문구란 옛 이름이 좋겠다고 박 행수는 생각했다. 남문구는 동래성 남문의 어귀이니, 지명 자체에 위치와 내용이 담겨 있다. 동래성에는 동·서·남·북에 드나드는 문과 동래부사청(동헌), 숙소, 무기고, 객사 같은 각종 관아 건물이 들어서 있다. 동래부사청은 마안산을 뒤쪽(북쪽)에 두고, 툭 트인 앞쪽(남쪽)을 향해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위치다. 한눈에 봐도 명당이다. 동래성의 남문은 사람과 우마가 출입하는 주문(主門)이기에 남문 입구 지역은 그만큼 요지라 할 수 있다.

부산도시철도 3호선 거제역 주변 일대는 옛날 남문구(동래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마을 자리였는데, 도시 개발로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사진은 거제역 인근의 동해선 거제해맞이역. 박수정 사진작가

박 행수는 동래에 올 때마다 남문구에 숙소를 잡았다. 동래의 정치, 경제, 생활 중심지인 동래성에서 이런저런 눈치를 보며 묵느니, 성밖이면서 교통요지인 남문구에서 묵는 편이 휠씬 마음이 편했다. 그곳에 완월(玩月)이란 주모가 있는 것도 마음을 끄는 요인이었다. 완월…. 달구경 한다는 건가, 달맞이 한다는 건가. 생각할수록 삼삼한 이름이었다. 게다가 남문구 앞쪽으로는 거벌(巨伐)이라 불리는 큰 벌판이 펼쳐져 눈맛이 시원했고, 주민들의 인심도 순후해 부산진이나 왜관을 오가는 보부상들이 즐겨 쉼터나 숙소로 이용했다. 알고 지내던 동래상인들을 불러 한잔하기도 남문구가 좋았다.

박 행수는 떠날 채비를 서두르며 등짐을 고쳐 맸다. 그때 주모가 달려와 손사래를 치며 동래성 남문 쪽을 가리킨다. 남문 쪽에서 부웅~ 하고 나발 소리가 몇 차례 울렸다. 소리가 나는 동래성 남문 쪽을 보니 아닌게 아니라 원님 행차 나발소리다. 남문 밖으로 기치 창검이 나무끼고 ‘물럿거라!’ 하는 아전들의 고함이 낭자하다.

“박 행수, 오늘 날 잘못 잡았수. 행수 왜관 가는 날이 동래부사 왜관 행찻날인기라. 날 잘못 잡았수.”

박 행수의 머리가 어지럽다. “아이고, 오늘은 일진 배럿네. 저 행렬을 뚫고 어떻게 장사를 한단 말이고…. 장사 배럿어!”

박 행수의 입에서 자칫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엄중한 관아 행사라 막을 수도, 불편을 호소할 수도 없었다. 이럴 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게 상책이다. 박 행수는 체념한 듯, “모리것다. 원님 행차 구경이나 하자”하고 마음을 다독였다.

남문구 마을 북서쪽에 있었던 십자산 터의 십자 조형물. 박수정 사진작가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기치 창검을 든 군관들이 앞장을 섰고, 말을 탄 동래부사가 구름같은 관을 쓰고 한껏 위엄을 뽐내고 있다. 그 뒤를 접대와 통교 사무를 맡은 접위관, 차비관, 훈도, 별차, 소통사들이 줄지어 따랐고, 다시 향리, 아전, 사령, 역리, 포졸들이 뒤를 이었다. 행렬 말미엔 잡색꾼, 예단지기, 그리고 동래 교방청 소속의 악공과 기녀들이 형형색색 옷차림으로 따랐다. 말을 탄 기녀들이 지날 땐 은은한 분 냄새가 풍겼다. 박 행수가 눈을 지그시 감고 냄새나는 쪽으로 코를 들이민다. 주모가 콧잔등을 씰룩거리며 박 행수를 타박하는 시늉을 한다.

시끌벅적한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행렬 참가자가 줄잡아 300명은 될 것 같았다. ‘동래부사접왜사도’에 나타난 10폭의 병풍 그림이 과장이 아니었다. 동래부사가 앞장 섰으니 동래부의 지휘부가 움직이는 형국이었다. 동래천에는 황로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고, 연도에는 백성들이 읍을 한 채 행렬을 구경했다. 남문을 나온 행렬은 광제교(현 세병교)를 지나 남문구를 거쳐 하마정(下馬亭) 앞을 지나갔다. 하마정은 세도가인 동래 정씨 2대 정문도 공의 묘지가 있는 곳이니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라는 의미를 갖는 곳이다.

거제역 사거리의 ‘빛의 마당’ 표지석. 박수정 사진작가

남문구에서 하마정 사이 작은 고갯마루는 주민들이 ‘횃바지(炬店)’라 불렀다. 옛날 부산진 시장은 4, 9일장으로 지역의 큰 시장이었는데, 동래쪽 사람들이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족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 나온 고갯마루라 하여 횃바지란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횃바지는 횃불맞이, 해맞이의 뜻도 품었을 것 같다. 아무튼 남문, 광제교, 남문구, 횃바지, 하마정, 부산진은 부산 옛길의 자취를 일러주는 지명들이다.

동래부사 행렬은 부산진성을 비껴가고 정공단을 거쳐 왜관 설문으로 들어간다. 길은 동래성 남문에서 왜관의 연향대청까지 약 30리였고, 왕복하면 꼬박 하루 코스였다. 동래부사가 이렇게 행차하는 것은 대일 외교와 교역을 위해서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왜 사신을 초량왜관에 묶어두고 찾아가는 형식으로 외교를 폈다. 왜 사신의 지역 염탐을 막고 통제를 위한 방편이었지만, 굴욕외교라는 말도 나왔다. 박 행수도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왜인들 길을 잘못 들여, 찾아가서 절 받는 외교를 한다’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행수 따위가 대놓고 불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정작 불만은 동래부사 왜관 행찻날엔 보부상이나 행상, 상인들이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 장사를 접었다는 생각에 박 행수는 기분이 씁쓸해졌다. ‘길을 내주어야 할 원님이 제 갈길 간다고 장사까지 못하게 하는 건 원(院)의 길이 아니다, 그건 길의 뜻이 아니다…’. 원(院)은 옛날 나그네들이 머무는 집이다. 박 행수는 터져나오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동래부사 행차가 있는 날은 부산진 시장을 왕래하던 동래사람들의 발걸음도 늦어졌다. 일부는 어둡살 속에 달빛을 머리에 지고 귀가를 서둘렀다. 그럴 때면 동래에 사는 가족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을 나갔다. 주모 완월도 친지를 마중하러 가끔씩 나간 적이 있었다. 청초한 달밤이면 마중가는 일이 자신의 이름처럼 달마중 가는 느낌이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횃불이 늘어났다.

하루를 보기좋게 공치고 내일 왜관 개시를 보기로 한 박 행수는 일찌감치 저녁상을 물리고 달밤을 핑계삼아 막걸리를 마셨다. 주모가 주제넘게 술상 끝에 앉아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몇 순배가 돌자 얼큰해진 박 행수가 말했다.

“이보오 주모, 저쪽 횃바지에 명멸하는 빛이 마치 바다의 어화(漁火) 같소.”

“바다엔 고기가 잘 잡히고, 행수님 같은 보부상은 장사가 잘돼야 좋은 세상인데.”

“어화 둥둥, 좋은 말이오. 남문구의 횃바지는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 같소?”

“새로 열린 동해선 광역철도 거제해맞이역 안 가봤소, 행수(行首)는 달리 걷는 자의 우두머리인데….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한다는 행수의 길눈이 이렇게 어두워서야.”

“무슨 얘기요?”

“호호, 저쪽 십자산(十字山) 아래쪽에 십자로가 뚫렸잖소. 부산도시철도 3호선 거제역과 동해선 거제해맞이역이지요. 부전역에서 일광까지 14개 역을 37분 만에 간다 안하요. 이제 남문구가 사통팔달이오.”

주모가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신통하게 앞날을 예견하자, 불콰해진 박 행수가 목소리를 높여 대꾸했다.

“그렇소. 길의 무한(無限)이오. 길은 끝까지 제 갈 길을 간다오. 우리 삶은 늘 길 위에 얹혀 있지요. 도리도표가 없을 때는 별빛과 달빛이 우릴 이끌었지요. 완월, 주모도 그렇게 길을 일러주었지 않소.”

“호호, 완월을 거기에 갖다 붙이시네. 그나저나 한 200년 후 남문구 거제해맞이역에 새 주막이라도 열면 그때도 박 행수님이 오시려나?” 박 행수가 대답 대신 주모의 손을 덥썩 잡았다. 달빛을 받아 화사해진 주모의 얼굴이 발개졌다.

박창희 스토리랩 ‘수작’ 대표

※공동기획: 동서대,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