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혼을 앞두고 몸이 쇠약해진
- 조선말기 권력가의 아들 김의겸
- 요양하러 찾은 낙동강 모래섬서
- 생전 처음보는 과실에 홀리는데…

- 호박같이 생긴 붉은 열매
- 꽃받침이 별처럼 예쁜 남만시
- 한 입 베어무니 기운이 솟고
- 그렇게 두 달 먹으니 생기가 돈다

- 한양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날
- 김의겸은 시신으로 발견됐고
- 독초라 불린 남만시를 권했던
- 수상한 노인이 추궁당하는데
- 그를 죽인 진짜 범인은 누굴까

낙동강 하류에 대저도(大渚島)라는 섬이 있다. 대저는 큰 모래톱이라는 뜻으로 낙동강 하류에 형성된 삼각주 중에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 조선 말기 이 모래섬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진 데에는 피살자가 김숙평의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김숙평은 당시 세도정치로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죽은 그의 아들 김의겸은 공주와 혼담이 오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차 부마가 될 사람이 요절했으니 임금 또한 사건을 철저히 수사할 것을 지시했다. 김의겸은 마음이 반듯하고 총명한 소년이었다. 열여섯 살이었지만 세상의 밝음과 어둠을 꿰뚫고 있었다. 사서삼경은 물론 잡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권세를 탐하던 가문에서 출생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심성이 곧았다. 그가 바르게 자란 데에는 외숙부의 영향이 컸다. 김의겸은 유년시절 외가에서 자라며 외숙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김의겸은 구중궁궐의 암투와 피비린내 나는 잔혹사를 듣고 정치라면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김의겸의 바람과 달리 부친은 김의겸을 도성으로 불러들여 정치에 입문시킬 계획이었다. 김의겸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거나 부친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삼갔다. 그것이 곧 가문의 장남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운명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국혼이 진척되어가자 김의겸의 몸에 탈이 났다. 김의겸도 제 몸까지는 속일 수 없었다. 마침내 그의 근심이 오장육부에 미쳤다. 시름시름 앓는 날이 많았다. 참고 끙끙 앓다 보니 내부에 열이 쌓여 온몸에 염증이 돋았다. 사실 김의겸의 병이 도진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김의겸은 외가에서 지낼 때 지척에 사는 한 소녀를 연모했다. 소녀와는 어릴 때부터 교분을 쌓아왔다. 이런 사실을 눈치챈 외숙부가 김숙평을 찾아갔다.

“매부, 의겸의 병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어린 나이에 가문을 위하려는 지나친 마음이 부담되어 병이 된 것 같습니다. 심신을 가다듬은 뒤에 국혼을 추진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허허, 사내가 저리 병약해서야…, 온갖 귀한 약재를 먹여 봐도 차도가 없네그려. 자네는 무슨 방도가 있는가?”

“의겸에게는 남도의 바람이 특효약입니다. 낙동강 하구에 대저도라는 풍광이 빼어난 모래섬이 있습니다. 먼 길을 가는 새들도 그곳에서 제 몸을 추슬러 다시 방향을 잡는다 하옵니다. 그곳 철새들이 사람의 근심을 물어간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대저도에서 서너 달 휴식을 취하면 밝은 얼 굴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김의겸은 외숙부의 권유로 여행길에 올랐다. 낙동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 칠백 리를 거슬러 내려왔다. 강에는 수로를 따라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향하는 수많은 세곡선이 떠 있었다. 배가 하구에 다다르자 하늘이 새카매졌다. 수천만 마리의 철새가 강 끝에서 오르내렸다. 검은 하늘 너머는 바다라고 했다. 대저도 나루터에는 강 건너 감동나루를 왕래하는 상인들로 붐볐다. 나루터에 양산군수가 관속들을 데리고 마중 나와 있었다. 필시 부친의 서신이 양산 감영에 먼저 닿은 것이다. 조선 팔도에 김숙평의 위세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김숙평에게 줄을 대보려는 양산군수는 어린 김의겸 앞에서 연신 굽실거렸다. 김의겸은 양산군수의 안내를 받아 한 초가에 여장을 풀었다. 군수와 관속들이 떠나자 고요가 찾아들었다. 노을 지는 허공에서 새들이 군무를 펼쳤다. 강가 갈밭에서는 바람이 악기를 탔다. 김의겸은 가만히 앉아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 밤 김의겸은 모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해가 중천에 솟아있었다. 방문 앞에 아침 끼니가 놓여있었다. 김의겸은 식사를 하고 대저도를 산책했다. 어제 도착한 나루터 근처에 큰 못이 하나 있었다. 못 가에는 동연정과 서연정이라는 정자가 마주 보고 있었다. 김의겸은 강을 따라 하류로 거닐었다. 망망한 들판 가운데 산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작은 봉우리가 일곱 개 솟아 있었다. 평야에는 띄엄띄엄 초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엎어놓으면 꼭 새의 둥지 같았다. 물난리가 잦아 자주 물에 잠기는 땅이라는데 이런 척박한 곳에 사람들이 들어와 논밭을 일궈놓은 걸 보니 실로 놀라웠다. 김의겸은 한 마을로 발걸음 했다. 처마에 약재가 걸려있는 집이 보였다. 마당에 몇몇 식물이 심겨있는데, 유독 한 식물이 눈에 띄었다. 줄기는 땅 위를 꿈틀꿈틀 기어 다니듯 뻗어 있고 마치 호박 같은데, 열매가 푸른빛이 나는 것도 있고 태양같이 붉은빛이 도는 것도 보였다. 꽃받침이 별처럼 예뻤다. 김의겸이 난생 처음 보는 과실이었다. 마침 뒤뜰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나타났다.

“어르신, 저 식물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남만(南蠻)시(토마토)라고 합니다(중국에서 남만은 태국이나 자바 등 남양군도를 가리킴). 일 년을 산대서 일년감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과실 같습니다만….”

“제가 오래전 북경에 사행 갔을 때 구해 온 것입니다. 청에서도 남만을 드나드는 서양인이 망망대해 너머 땅끝에서 가져온 진귀한 식물이라고 들었습니다. 대저의 비옥한 땅과 아주 잘 맞는 식물입니다. 열매에 찬 성질이 있어 몸에 열을 식히고 위의 갈증도 억제하고 우울증이나 무기력증에 좋아 약재로 쓰고 있습니다.”

“소인이 맛 좀 볼 수 있겠습니까?”

“푸른 것은 아직 떫으니 붉은 것을 드셔 보십시오.”

김의겸은 노인이 따주는 남만시 하나를 받아들었다. 열매의 붉음에서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푸성귀 냄새가 좀 났으나 열매 자체에 큰 향은 없었다. 김의겸은 남만시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 냉수를 한 사발 들이킨 듯 속이 시원했다.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져 기운이 솟았다. 이후 김의겸은 말벗도 할 겸 자주 박 씨 노인을 찾아갔고, 그때마다 박 씨 노인은 남만시를 내어놓았다. 손이 부끄러운 날은 박 씨 노인에게 자신이 가져온 서책을 건네기도 했다. 김의겸이 대저도에 발을 디딘 지 두어 달 되었을 때, 김의겸은 예전의 앳된 얼굴로 회복돼 있었다.

김의겸의 동생이 부친의 서신을 가지고 대저도에 찾아왔다. 서신에는 곧바로 한양으로 올라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정략결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김의겸은 담담히 국혼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김의겸은 동생 앞에 박 씨 노인에게 얻은 남만시를 내어놓았다.

“형님, 이건 남만시가 아닙니까?”

“오오, 너는 남만시를 아는 게로구나. 이웃 노인이 주었는데 한 번 먹어보아라. 조선 천지에 이런 과실이 또 있을까 싶구나.”

“형님, 이건 독사의 먹이입니다. 냄새를 맡아보셨습니까? 역겨운 냄새가 나고 잎과 줄기에는 독이 퍼져있고 열매를 먹으면 메스꺼움이나 구토를 일으킨다고 들었습니다. 독초입니다. 독초!”

“내가 두어 달 먹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얼굴이 환하지 않으냐? 먹기 싫으면 관둬라. 그리고 너는 먼저 돌아가도록 해라. 나는 그동안 신세 진 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뒤따르겠다.”

다음 날 아침 김의겸의 동생이 먼저 떠나고, 강변에서 김의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양산군수는 오금이 저렸다. 양산군수의 보고를 받은 경상관찰사 또한 온몸이 부들거렸다. 장차 부마가 될 사람이 자신의 관할에서 죽었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경상감영에서 감당할 사안이 아니었다. 관찰사는 즉시 김의겸의 사망 소식을 조정에 올렸다. 임금은 어사를 파견했다. 어사는 대저도에 임시 수사청을 세웠다. 검험 결과 김의겸의 실인은 익사로 추정됐다. 그러나 시신 발견 현장의 수심이 낮아 쉬이 자살로 결론 내리지 못했다. 게다가 죽은 김의겸의 입안에서 정체불명의 씨앗도 발견됐다. 어사는 씨앗이 박 씨 노인의 집에서 키우던 식물이라는 걸 알아냈다. 어사는 포리를 보내 박 씨 노인을 수사청으로 압송했다. 예비 부마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져 수사청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너는 무슨 연유로 김의겸을 살해했는가?”

“억울합니다.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김의겸의 입안에서 네놈이 키우던 식물의 씨앗이 나왔다. 오랫동안 그 열매를 김의겸에게 먹인 걸 본 사람도 있다. 네놈이 김의겸을 독살하고 익사로 위장한 것을 나는 다 안다. 이실직고하라.”

“정말 아닙니다, 사또. 저 열매는 남만시라고 하는데, 약재로 씁니다.”

“여기 이 열매를 알거나 먹어본 자가 있는가?”

사람들이 서로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어떤 사람이 독초라고 외쳤다. 또 한 사람은 한입 깨물었으나 메스꺼워 바로 뱉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인근 고을에서 온 한 의원은 남만시가 유독하고 먹으면 금세 열이 나서 즉사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들었느냐? 필시 네 단독 소행이 아닐 것이다. 배후가 누구냐?”

“믿어주십시오. 결코,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 남만시를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네놈이 막다른 곳에 이르니 자결할 속셈이구나. 어림없다.”

어사는 박 씨 노인에게 남만시를 먹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대신 염소를 끌고 와 남만시를 먹여 보았다. 하지만 염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어사는 고심하다 박 씨 노인에게 남만시를 건넸다. 박 씨 노인이 남만시를 먹으려 하자 뒤에서 구경하던 여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다들 박 씨 노인이 피를 토하며 쓰러질 것으로 생각했다. 드디어 박 씨 노인이 남만시 하나를 먹어치웠다. 하지만 박 씨 노인은 멀쩡했다. 어사는 김숙평의 서슬 푸른 눈빛이 떠올랐다. 한 번의 시식으로 판단하기에는 이르다고 여긴 어사는 박 씨 노인을 옥에 가두고 인근 감영의 사형수들에게 남만시를 먹여 시험했다. 고초를 겪고 굶주린 사형수들은 감영에서 주는 남만시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어사는 남만시가 맹독성 열매가 아니라 서서히 내장을 파괴하는 종이라 판단하고, 재수사를 하는 동안 매일 사형수에게 남만시를 먹였다. 자칫 복검을 했을 때 다른 결과라도 나온다면 삭탈관직을 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달 동안 남만시를 먹은 사형수들은 죽기는커녕 낯빛이 돌아와 윤기가 흘렀다. 박 씨 노인의 말대로 아무래도 남만시는 약재가 맞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문으로 다 죽어가던 사형수들의 낯빛이 좋아졌을 리가 없었다.

어사는 공연한 짓으로 시간만 허비한 꼴이 되었다. 어사는 할 수 없이 익사로 결론을 내리고 장계를 준비하며 마지막으로 검토를 해보았다. 그러다가 겨린(증인)들의 진술서를 다시 들여다 보다가 께름칙해 김의겸의 동생을 태우고 간 사공을 불러 심문했더니 결국 자백을 받아냈다. 김의겸의 동생은 평소 형의 자리가 탐났다. 부친의 서신을 자진해 들고 온 뒤 형이 남만시를 오래도록 먹은 사실을 알고 야밤에 함께 산책하러 나간 뒤 형을 죽이고 실족사로 꾸민 짓이었다. 김의겸의 동생 또한 남만시가 환각이나 최음 성분이 든 열매로 오인하여 저지른 사건이었다.

강성민 소설가

※공동기획: 동서대,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