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왕 왕비가 된 김해 출신 기생
- 이성계 후궁도 칠점선으로 기록

- 일본인 고리대금에 땅 뺏기고
-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
- 배밭은 토마토 농장 바뀌고
- 명지소금 명성 염전은 파밭으로
- 지금은 아파트 들어서 상전벽해

- 천재지변 때 들렸다던 땅울음
- 비행기 소음에 묻힌게 아닐까

어쩌면 칠점산은 강서 평야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들의 여러 곳에 드문드문 별처럼 흩어졌다. 북두칠성이 땅에 내린 곳, 강서구의 어느 평야에서 나는 일 년을 보냈다. 칠점산과 명지 소금과 그 땅에 대파를 심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미래에 8만 명이 살게 된 명지국제신도시와 7만5000명을 살게 하리라 예상되는 에코델타시티 아래 묻혀 삭힐 시간을 기다리는 듯, 먹먹한 초록의 고랑 사이를 떠돌며 말이 없었다.

먼 옛날 고산자 김정호도 지도를 그리기 위해 강서에 왔다. 김정호의 지도엔 칠점산과 명지도, 가덕이 큰 세 개의 섬으로 기록되었다. 강이 바다를 만나고, 육지가 끝나는 곳, 비옥한 평야와 넘치는 빗물을 가진 곳, 섬과 섬 사이를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강서의 땅은 스스로 움직이고 잠기고 깎이며 모습을 바꾸었다.

나는 강서구청역에 내렸다. 역 뒤편의 금수현 음악거리에는 식당과 상점이 제법 많이 들어차 있었다. 구청 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나오는 덕에 이뤄진 상권이다. 수많은 음표가 난간을 따라 붙은 거리는 짧았지만, 지휘자 금난새의 아버지 금수현의 이야기를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기엔 충분했다. 정미업과 땅콩을 재배하던 농가에서 독학한 성악으로 도쿄음악대학에 합격한 남자, 해방과 동시에 성을 순 우리말인 '금'으로 바꾸었다는 금수현. 그가 세계적인 지휘자, 금난새를 만들었다.

강서구청으로 발길을 재촉하면서, 강서구에 살았던 어린 시절의 단편 하나를 떠올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작지대, 고랑과 좁은 흙길을 사이사이에 두고 벼나 채소나 내키는 대로 농사를 짓던 곳, 나는 대저동 김해공항 옆에 바투 붙어 사는 어린애였다. 삼각형 지붕을 쓴 양옥이 몇 채 있었고, 우리 집은 다세대 양옥 안에 입식 부엌이 딸린 단칸방이었다. 아버지는 북부경찰서로, 어머니는 김해공항 청원경찰로 출근을 했다. 하루에 네 대의 버스를 갈아타고 본가인 문현동과 강서구를 오가며 보모 노릇을 자처한 할머니는 분가시킨 장손의 단칸방에 앉아 종일 손녀를 돌보았다. 나는 할머니 손을 잡고 들로 나가 푸른 파뿌리를 세며 놀았다.

부산 강서구 대저동에 있는 칠점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이름이 기록돼 있다.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파는 단맛이 난다고 했다. 몇 포기씩 서리를 해가도 밭주인은 모른 체했다. 김해에서 소작으로 벼농사를 짓다 장남을 따라 부산으로 이주한 할머니는 남의 밭 채소 몇 포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훑어 비닐봉지에 넣었다. 다섯 살 손녀의 손을 잡고 평생 가져보지 못한 밭 둔덕을 서성이는 할머니에게 대저동 사람들은 인심이 좋았다. 할머니는 땅을 가져보지 못했고, 아버지는 집을 가져보지 못했다. 동시에 형편이 풀린 것은 어느 마실 길에, 남의 집 밭고랑에서 내가 발견한 백사 두 마리 때문이었다. 허연 진주색으로 번들거리고 칭칭 꼬여 기묘한 소용돌이를 만든 백사 두 마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는 밭 한중간에 나를 세워두고 집으로 달려갔다. 나는 몇 십분 간 정사를 치르는 백사 두 마리를 훔쳐보며 목이 쉬어라 울었다. 헐떡이며 연탄집게를 들고 온 할머니는 백사 두 마리를 쌀포대에 담았고, 어디서 돈으로 바꾸었는지도 모르는 사이, 부모님은 덕천동에 전셋집을 장만했다. 술에 담글 백사 한 마리가 백만 원을 호가하던 시절이었다.

강서구를 떠나던 날, 나는 머리 위로 지나가는 마지막 비행기의 배때지를 보았다. 비행기는 백사처럼 허연 아랫도리를 드러내고 굉음을 내며 하늘을 두 쪽 내고 있었다. 자연재해나 천재지변 때마다 명지에서 울렸다는 큰 굉음은 공항에서 일정하게 들렸다. 어쩌면 명지가 더는 울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비행기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게 된 게 아닐까. 삼촌과 함께 이삿짐 트럭 짐칸에 앉은 나는 언제나 그랬듯, 굉음을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았다.

강서구 명지는 과거 국내 최대 대파 생산지로 유명했으나 근래 신도시 개발 등으로 파밭이 많이 사라졌다. 사진은 명지의 마늘밭.

스물대여섯 살, 연애를 하게 된 남자는 명지에 땅이 있다고 했다. 그의 외할머니는 손바닥만한 파밭을 가진 과부였다. 커다란 황토솥에 구운 자오염을 생산하던 명지 염전이 사라지자 주민들은 짠맛이 나는 땅에 파를 심었다. 그의 할머니가 조금씩 밭을 넓혀 마침내 몇 만 평의 파밭을 가지게 되자 그 자리에 명지신도시가 들어섰고, 작물을 심던 농민들은 허리뼈가 빠져라 일구던 파밭을 내주고 이주했다. 일부를 팔고 농사를 계속하던 이들은 '벤츠 몰고 밭에 와 트렁크에서 농기구를 꺼낸다'는 속된 스캔들을 감당해야 했다. 할머니의 파밭 덕분에 노가 난 집안은 형제 간 재산상속 문제로 다투는 일이 잦았다. 장녀였던 그의 어머니는 몇 백 평의 논을 받았을 뿐 소란에 치어 빈손을 더 벌리지 못했다. '명지에서 노난 집 애들은 서면 클럽에 와서 놀아도 촌티가 난다'는 지역 차별의 언어가 떠돌았다.

그와 몇 번 데이트를 한 후 그는 자기네 땅에서 난 쌀이라며 내 자취방에 흰쌀 십 킬로그램을 들여놔 주었다. 빈 땅으로 놀리면 세금을 더 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어 쌀농사를 거들고 있다고 했다. 그가 준 쌀로 지은 밥을 먹으며, 나는 국문과에서 배우는 구비문학 리포트를 썼다. 김해 지역의 민담과 설화를 채록하는 것이 우리 조가 받은 숙제였다. 가락국은 금관가야의 옛모습인데, 가야가 신라가 되고 신라가 고려가 된 어느 장대한 역사 한 귀퉁이에서 여인 한 명을 발견했다. 나는 칠점선이라는 그녀의 이름을 줄마다 드문드문 채워 넣었다. 김해 기생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김해평야가 강서평야를 겸하고 행정구역상 이름을 달리 한 것이니 칠점선은 강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그녀는 경상도 무관이었던 남질의 첩이었는데, 우왕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강제로 빼앗아 자신의 첩으로 만들었다. 왕의 아들이 아니라 승려의 아들이라는 소문에 평생 시달렸던 우왕은 칠점선을 왕비로 봉해 영선옹주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기생이 왕비에 오르자 백성들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 '해괴하게 여겼다'고 한다. 칠점선은 우왕의 폐위와 함께 사가로 쫓겨가는데, 조선이 건국된 후 칠점선이라는 이름이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이성계의 후궁, 화의옹주 역시 김해 기생 출신의 칠점선으로 기록된 것이다.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칠점산을 본딴 이름으로 천민인 여성이 권력을 쥔 사례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드물다, 라고 나는 리포트의 마지막 줄을 채웠다.

도시철도 강서구청역 인근에 조성된 금수현 음악거리.

에코델타시티의 녹지 면적은 24%에 달합니다, 부산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입니다, 라고 구청 공무원은 말했다. 커다란 강서구 지도는 해안선에 꼭짓점을 두고 기우뚱하게 선 마름모꼴이었다. 강서구는 산업단지를 바로 곁에 두고 있습니다, 사통팔달이라 지리적으로 굉장히 좋습니다. 연달아 주거단지를 계획하는 이유가 설명되었다. 높은 녹지 면적과 절경을 낀 지리는 신도시를 만들었다. 파밭을 걷어내고 세워진 명지국제신도시에는 젊은 맞벌이 부부들이 자리를 잡았고, 아이들이 다닐 교육시설도 추진되고 있었다.

내 어린 날에 목격했던 적막한 강서구의 변화가 낯설었다. 구한말부터 3대째 강서구에 산다는 60대 마을 해설사는 강서구의 퇴적물이 만들어낸 옥토에서 대대손손 농사를 지었다고 했다. 조선 철종 때 큰 홍수가 났는데, 강서고교 옆의 '번등'이라는 고지대에 있던 팽나무 밑으로 사람들이 피신해 목숨을 구함으로써 '활인정'이란 이름을 왕이 직접 내렸다는 이야기, 퇴적토 때문에 점차 넓어지며 살아있는 태를 냈다는 명지 이야기, 퇴적토에서 자란 갈대를 따서 가마솥에 구운 소금을 만들었다는 염전 이야기, 배를 타고 안동까지 올라가 그 소금을 팔았다는 이야기 등. 강의 본류를 바꾸는 제방공사가 있었던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드문드문 있던 대저 쪽 제방을 하나로 잇는 일천식 공사에 주민들을 동원해 임금을 주었다가, 농경지에서 다시 수탈을 해 재산을 빼앗아갔다. 수확한 농작물을 뻔히 강도질해가는 식이 아니라 땅을 차지하고 주민에게 소작을 주는 식이었다. 그래서 대저는 토마토를 재배하기 전에 배 농사가 더 한창이었다. '구포 배'로 불리며 구포장에서 팔려나갔던 최상등급의 배는 사실 '대저 배'였던 것이다. 근대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거기서 더 상상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경업 선생을 만났다. '부산을 배웁시다' 시리즈와 직접 그린 펜화를 곁들인 '부산이야기99' 등의 저서 외에도 부산 최고의 민학자라 손꼽히는 그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나는 글로 다 쓸 수 없는 경탄의 시간을 보냈다. 이리저리 주워듣고 조각조각 공부한 스토리텔링과 민학이 하나의 물길이 되어 물꼬가 트였다. 선선히 연구실로 초대해주신 그는 일흔 다섯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기력과 치밀한 구성력, 구체적인 기억력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의 마을이 뿌리를 내려 정통성을 찾을 때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그런 우여곡절을 제대로 이해하는 분이 계시고, 그저 사는 눈으로 바라보는 분도 계시지요. 우리 청자는 두 가지 이야기를 모두 섭렵해야 합니다." 선생은 당신이 쓰신 책 한 페이지에 실린 강서구 지도를 펼쳐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으며 강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하중도가 모여 삼각주를 만들었지요. 영어로 '델타'라고 합니다. 없는 땅이 생긴 거니까 땅의 역사가 얼마 안 되어서, 정착한 사람들이 무척 힘들었지요. 하지만 땅이 좋아서 채소농사가 잘 되었어요. 지금 부산근대문화역사관 건물이 옛날엔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였어요. 일본인들이 '솥 하나 걸 재력이 없어도 강서 땅에 들어온다'라는 기록도 있어요. 가뭄에 농사가 잘 안 되면, 일본인들은 동척에서 무이자로 빌린 돈을 농민들에게 고리대금으로 빌려줬어요. 못 갚으면 땅을 빼앗고. 농민들은 소작농이 되었지요. 그 땅에서 일본인들이 처음 배 농사를 지었습니다. 소작료가 처음에는 오오제(5대 5)였다가, 육사제(6대 4)였다가, 나중엔 칠삼제(7대 3)까지 되었으니 논밭이나 집은 물론이고 마누라나 딸까지 팔게 되는 일이 있었지요. 명지에서 구운 소금은 소금 중에서도 가장 비쌌고, 손으로 만졌을 때 밀가루처럼 고왔다고 해요. 입에 넣으면 단맛이 먼저 나고요. 인건비와 땔감이 많이 드는 일이라 소금밭을 가지고 있던 농민들이 감당을 못하고 차츰 땅을 팔게 되기도 했는데, 1954년에 태풍 사라호가 오는 바람에 싹 쓸려가 버렸습니다. 먹고 살 게 없어진 사람들이 결국 파 농사를 짓게 된 거지요. 그런데 이게 환경이 잘 맞아서 기가 막히게 잘 됐어요. 한때는 전국 파 수확의 80%를 차지했답니다. 지금은 주거지가 들어섰지요."

단숨에 풀기에는 아까우셨던 탓일까, 주경업 선생은 '이 이야기를 가지고 스토리텔링을 해보라'며 마지막 차 한 모금을 삼켰다. 선생의 저서들을 한아름 안고 돌아오는 길, 나는 리포트로 소진했던 칠점선 이야기와 스쳐간 인연의 노난 파밭과 백사가 또아리를 틀던 강서구의 밭고랑을 차례로 떠올렸다. 비행기 한 대가 하얀 배를 보이며 하늘을 갈랐다. 굉음은 들리지 않았다. 명지의 땅울음 역시 아직 너무 멀어 들리지 않았다.

김유리 작가

※공동기획: 동서대,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