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0년 전 존재했던 거칠산국
- 지배층 무덤 18기 배산에 남아

- 고분 알아본 혜원정사 주지
- 도로 건설 막고 보존 앞장서
- 가치 인정받아 국가사적 지정

- 아파트 숲 도심 한가운데 위치
- 올라서면 광안대교까지 보여

- 나라잃은 백성 눈물 보이는듯
- 멸망국 왕조의 통탄 들리는듯
- 흥망성쇠 이야기 담고 그 자리에

우리가 한밤중에 배산에 오르게 된 건 형 때문이었다. 만났다 하면 서로 담력이 세다고 우겨대는 우리를 보다 못한 형이 며칠 전에 방법을 제시했다. "싸울 거 뭐 있노? 밤중에 무덤이 많은 산에 올라가 보면 대번에 알 걸. 배산이 딱 좋겠네. 집에서 가깝지, 거대한 고분군에 무덤도 많지, 높지도 않지, 담력 시합하기엔 그저 그만이잖아? 야경도 멋있을 걸?"

	배산(盃山) 북쪽 자락의 부산 연산동 고분군. 삼국시대 고총 고분 유적인 이곳은 크고 작은 봉분이 능선을 따라 배치돼 있다.

형이 빙글거리며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호기심이 부쩍 발동한 얼굴들이었다. 솔직히 나는 내키지 않았다.

배산은 여름방학 때 부산의 숨겨진 유적찾기 과제를 하기 위해 갔던 곳이었다. 경주에서 봤던 거대한 봉분들이 배산에도 있었다. 모두 18기였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존재했던 거칠산국의 지배층 무덤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잔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잔뫼'라고도 불리는 산은, 도심 한가운데서 집들에 빙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 산에 그렇게 오래된 유적들이 있다니 정말 신기했다.

결국 우리는 밤 열시, 배산역 6번 출구에서 만났다. 우리는 쌍미천로를 따라 가다가 고분로를 통과해 혜원정사 앞에서 배산 숲길을 오르기로 했다. 배산 정상까지는 256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부산 시내를 거의 다 굽어볼 수 있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막상 길을 나서니 은근히 기대가 되기도 했다. 고1이 되면 입시 때문에 지금보다 더 빡빡한 생활을 해야 하고, 3년 동안은 친구들도 지금만큼 못 볼 거라 생각하니 아쉬워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사총사'였던 우리는 중학교까지 같이 다녔는데, 고등학교는 뿔뿔이 흩어져 다녀야 했다. 아마도 이 야간산행이 중학교 마지막 단합대회가 될 것 같았다.

우리는 그런 얘기들을 해가며 혜원정사 앞에 이르렀다. 그곳에 이르니 사방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와락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번 기회에 우리 넷 중에 제일 겁쟁이로 비쳤던 나에 대한 선입견을 씻어내고 싶었다. 우리는 혜원정사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다들 걸음이 빨랐다. 얼마쯤 올라가다가 재영이 뜬금없이 말했다.

"난, 거칠산국이 어쩌다 망해삔는지 궁금하다. 배산 정상에서 부산 시내가 거의 다 보이는데, 거기서 보초 서면 다른 나라가 쳐들어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어째서 못 막고 신라에 합병됐는지 진짜 궁금하다. 귀신이 있음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역시 재영이다웠다. 평소 호기심도 많고 간도 제일 컸다. 재영은 사학자가 되는 게 꿈이어선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도 이런 때 귀신을 들먹이다니, 재수 없는 소리였다.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니 혼자 마이 물어봐라. 나는 표지석에 점찍고 바로 내려올 끼다."

"야, 진짜 귀신 있으머 한 번 만나보고 싶다."

"나도!"

뜻밖에 정규도, 영우도 맞장구를 쳤다. 녀석들은 또 나를 놀리는 것이다. 나는 플래시 불빛을 녀석들 얼굴에 마구 비췄다. 녀석들도 내 얼굴에다 불빛을 쏘아댔다. 우리는 서로 그러면서 산길을 올랐다.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의 찬 공기를 뚫고 뻗어나갔다.

플래시 불빛이 있어선지 밤 산길은 생각보다 걸을 만했다. 보름달은 아니지만 달빛도 좋았다. 드디어 산 중턱에 이르렀다. 크고 작은 무덤들이 한 무더기 나타났다.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휫휫 소리를 냈다. 나는 모자를 귀까지 푹 눌러썼다. 영우는 갑자기 노래를 불러댔다. 블락비의 '예스터데이'였다. 우리는 커다란 소리로 '예스터데이'를 따라부르며 걸음을 재게 놀렸다. 노래가 끝나자 앞서 가던 정규가 갑자기 커다란 소리로 외치다시피 말했다.

	배산에서 보이는 해운대 일대.

"전번에 왔을 때 보니까, 여기 80년 넘은 무덤도 있더라. 그때 쌤이 그러던데, 소화 10년인가 적힌 거는 1935년이라카대. 일제 강점기 때 무덤들이 많은 거 보모 그때부터 이 근처에 사람이 많이 살았던 거 같제?"

"야, 당근이지. 천오백 년 전에도 여기 거칠산국이란 나라가 있었다는 거 들어놓고 그딴 소리 하노? 우리 아버진 어릴 적에 이 근처 살았는데, 묘지에 와서도 놀고, 고분에 올라가서도 엄청 놀았다 하더라. 고분들이 다 그냥 동산인 줄 알고…."

영우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상하게 다들 목소리가 커졌다. 걸음도 빨라졌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닌 척해도 다들 무서운 것이다. 나도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더욱 으스대듯 말했다.

"너거 그거 아나? 고분군이 그냥 무덤이 아니라꼬 맨 첨 알아본 사람이 혜원정사 주지스님이었다는 거."

"진짜가?"

정규가 되물었다.

"응, 그 스님이 연산동하고 광안리를 잇는 도로 건설할 때, 저 무덤은 보존해야 된다꼬 엄청 주장했다더라. 산 허리를 잘라뿌모 무덤이 사라지니까 터널을 뚫어야 한다면서…."

"맞다! 그때, 무덤의 가치를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없었으면, 부산에 유일하게 남은 고대국가의 흔적이 사라졌을 거라고 쌤이 그러셨다. 그러면서 이러셨다아이가. 지혜로운 사람은 역사를 만들고, 어리석은 사람은 역사를 훼손하게 돼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될지 잘 생각해보세요."

영우가 선생님 목소리를 흉내내며 하는 말에 우리는 왁자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 끝에 정규가 덧붙였다.

"아, 그래서 혜원정사에서 2010년부터 가을마다 '거칠산국 고분군 왕릉제'를 지내는 건갑다. 듣고 보이 진짜 18개라도 남아서 참 다행이다. 까딱 잘못했으모 오래된 유적들이 다 사라지고 길이 될 뻔했네."

모두들 다른 때와는 달리 어지간히 학구적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쉴새 없이 주거니 받거니 떠들어대면서 무덤들을 지나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잔뫼정과 체련장이 나타났다. 그 위쪽에 거칠산국 사람들이 이용했다는 우물터가 있었다. 그걸 보자, 우리가 고대왕국의 역사 속으로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그 앞에 잠시 섰다. 재영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칠산국이 사라진 지 천오백년이 다 돼 가는데, 이 우물은 어째서 땅속에 영영 안 묻히고 우리 앞에 이렇게 남아 있을까? 꼭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그때, 숲 어디선가 두웅둥, 북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였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상한 북소리였다. 영우가 어깨를 움츠리고 내 쪽으로 바싹 다가섰다. 들었지? 응. 재영이도, 정규도 가까이 다가서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야, 빨리 올라가서 표지석에 점찍고 얼릉 내려가자."

영우가 겁에 질린 소리로 말했다. 영우가 나보다 먼저 그런 말을 한 것은 뜻밖이었다. 나는 악착같이 두려움을 견뎠다. 짜식, 쫄기는…. 재영이 짐짓 목에 힘을 주며 영우를 돌아보았다. 그때, 북소리가 멈추더니 산 아래쪽에서 너울처럼 생긴 희미한 불빛이 우리 쪽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고분군 쪽이었다. 머리끝이 쭈뼛 섰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던지 재영이 소리쳤다. 야, 뛰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이 턱에 닿게 정상을 향해 뛰었다.

정상에 닿자, 하늘의 별이 다 배산 주위에 쏟아져 내린 것처럼 눈부신 불빛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산 아래의 높고 낮은 건물들에서 쏟아져 나온 불빛과 수영강변로를 달려가는 차들의 불빛과 멀리 광안대교 불빛이 함께 어우러져 갑자기 빛 무리에 갇힌 것 같았다. 우리는 조금 전에 가졌던 두려움을 금세 잊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아, 부산의 야경이 한눈에 다 들어오네. 정말 굉장하다, 우리끼리 보기 아깝다."

평소에도 여자애처럼 감탄을 잘하는 정규는 호들갑스러웠다. 그때, 뒤에서 느닷없이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날마다 이 풍경을 보고 있지."

땅속 깊은 데서 흘러나오는 듯 짓눌리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우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갑옷과 투구를 입은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나이는 짐작할 수 없었다. 형체가 뚜렷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분명 사진 속에서 보던 옛 장수들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겁에 질려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재영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용기가 났는지 앞장서 물었다.

"누, 누구세요?"

"두려워 말라. 나는 그대가 만나고 싶어 했던 거칠산국의 왕이다."

우리는 다 같이 얕은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재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우리도 따라 엎드렸다. 그가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내 말을 전할 사람을 기다려왔다.… 나는 아주 긴 세월 동안 여기 누워 있었다. 그 많은 세월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이 산하를 휩쓸고 갔던가. 나는 영면의 고독 속에서 그 모든 소리를 들었다. 번영과 멸망을 거듭하는 수많은 왕조와, 백성들의 기쁨과 한숨과 피눈물의 절규를…. 생의 고통은 죽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잃어버린 내 왕조에 대한 그리움과 돌이킬 수 없는 회한과 오욕의 세월이 되살아나서였다. 날마다 나는 비통하기 그지 없었다."

그의 주절거림은 마치 연극대사를 읊듯이 이어졌다. 목소리에는 위엄이 넘쳐났다. 우리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무릎이 맞닿은 서로의 체온에 겨우 두려움을 달래면서 그의 말을 들었다.

"어찌 나만 그랬으랴. 후세 사람들이 '연산동 고분'이라 이름 붙인 이 무덤의 열여덟 영혼들 중에는 나처럼 밤이면, 완전한 영면에 들지 못한 채 부스스 깨어나는 영혼들이 있다. 우리는 밤마다 모여 앉아 먼지처럼 흩어져간 세월에 대해 얘기를 나누곤 한다. 백골은 진토 되어 흔적도 없는데 영혼은 살아 한때 우리의 영토였던 이 땅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나의 깊고 깊은 후회는 신라의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으로 왔을 때, 그의 군사들이 매년 한 번씩, 장토(張吐) 들판에 말들을 모아놓고 말 달리는 놀이를 하는 것을 예사롭게 본 것이다. 그 방심으로 인하여 그들의 공격에도, 나는 그들이 말 달리는 놀이를 한다고 생각하고, 적군이 깊이 들어오기 전에 군사를 풀지 못했다. 그 어리석음으로, 결국 나의 왕국은 신라에 예속되어 치욕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어리석은 군주로 인해 멸망해버린 나라에서 백성의 고통은 끝이 없었다. 나는 죽어서도 죄 없는 백성들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통탄을 가슴에 품고 나는 내 왕조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기를, 그 통한의 세월을 누군가는 알아주기를, 저 검고 깊은 땅속에서 날마다 기원했다. 이제 내 왕조의 흔적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땅속에 묻힌 역사 속에 한 나라가 존재했다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될 터이니, 더 이상 여한이 없다. 그대들은 부디 돌아가서 나의 이 고마움을 전해 달라. 나는 이제 편히 영면에 들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이마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잠깐 스쳤다 사라졌다. 그 느낌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우리는 꿈에서 깨어난 듯 몽롱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들만이 영롱하게 시야를 메웠다. 나는 가만히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지독하게 아팠다. 곁에 있던 재영이 무릎을 툴툴 털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야, 우리 다 똑같이 간이 크다. 아무도 기절 안한 거 보니까."

나는 속으로 싱그레 웃었다. 아이들이 재영의 말에 맞장구치면서 모두 잠에서 깨어난 듯 부스스 일어났다. 그리고는 하나같이 플래시를 들고 우리가 뛰어온 길을 비쳐보았다. 그때, 우리는 환한 숲길 뒤편 어둠 속으로 거칠산국의 왕이 흐뭇하게 웃으며 걸어가는 걸 본 듯했다.

정인 소설가

※공동기획: 동서대,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