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인 유관순(1902∼1920) 열사의 독립운동 서훈등급은 '3등급'이다.
3·1 운동 제98주년을 맞아 기미년(1919년) 그날을 재연하기 위해 '아우내봉화제'(충남 천안)와 '3·1 독립운동 희생선열 추모식'(서울 탑골공원) 등 각종 기념행사가 잇따라 열리고 있지만,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 열사 훈격은 건국훈장 독립장에서 변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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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오전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제98주년 삼일절 기념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 행사장에 유관순 열사의 사진이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
김구 이승만 안창호 안중근 등 30명이 대한민국장(1등급)이고, 신채호 신돌석 이은찬 등 93명은 대통령장(2등급·93명)으로 분류돼 있다.
유 열사는 이들 인사의 한 등급 밑인 독립장(3등급)에 포함돼 있다. 김덕제, 김도현, 김마리아, 장지연 등 823명 중 한 명에 불과하다.
정부가 1962년 독립유공자의 훈격을 결정한 이후 여러 차례 조정 필요성이 제기돼 왔고, 손인춘 전 새누리당 의원이 위인의 공적에 대한 재심의를 통해 훈격 조정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 '상훈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유 열사 훈격에 대한 판단이 국민적 인식이나 평가에 비해 턱없이 저평가됐기 때문에 상향 재조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최근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실현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충청남도 천안(天安)에서 태어난 유 열사는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 입학했다. 1916년 선교사의 소개로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했다. 1918년에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에 참가했다. 일본총독부의 학교휴교령으로 휴교에 들어가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천안 연기(燕岐) 청주(淸州) 진천(鎭川)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해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음력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주도했다. 이에 놀란 일본 헌병은 총칼을 휘두르며 독립운동 가담자를 학살했다. 이때 이에 항의하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이 헌병의 총검에 찔려 살해당했고, 이를 보고 절규한 어머니마저 일본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피살됐다. 이날 일제의 총칼에 19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했다. 유 선생은 부친의 시신을 둘러메고 헌병 주재소를 방문해 고야마 주재소장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재서 총을 사용해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항변했다.
유 선생은 이후 주동자로 체포돼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영명학교(永明學校)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온 오빠 유관옥(柳寬玉)을 만났다. 선생은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며 기개를 보였다. 그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920년 꽃다운 나이인 18세에 고문에 의한 장독으로 옥사했다.
충청남도는 그녀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2년에 유관순상을 제정했다.
여성의 몸이지만 용감한 남성 못지 않은 기개를 보인 유 선생의 훈격에 후손은 의문을 제기한다. 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