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부산도시철도 2호선 스토리 여행 <7> 에필로그- 장산역에서 양산역까지

해운대와 금정산, 낙동강의 기운 뒤섞여 '부산다움'을 보여주다

박창희 대기자
| 입력 : 2016-11-13 18:45:04
| 본지 13면

- 부산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
- 45.2㎞ 연둣빛 급행열차

- 고씨할매 설화의 장산서 시작
- 문화매개공간 '쌈' 수영 지나
- 옛날 지명서 이름 따 온
- 지게골·율리·동원 거치면
- 낙동강 탁 트인 호포·양산

- 끼룩끼룩 갈매기 차임벨 울리고
- 영화제땐 영화전용칸으로 깜짝
- 도시의 일상과 자연이 넘실대는
- 다이내믹 부산을 닮은 도시철도

#장산, 장산국, 장산역

해운대 장산역 플랫폼에서 잊혀진 고국(古國)을 생각한다. 장산국(萇山國)이라지. 달빛에 젖어 빛바랜 신화가 된 삼한시대의 작은 부족국가. 해운대 장산(634m) 어드메에 있었다던가, 동래 어드메에 있었다던가. 토성을 쌓고 우물을 파고 농사 지으며 욕심 없이 허물없이 살았다는 부족…. 장산국은 문헌에 나오는 이름이다. '삼국유사'에는 '통일신라 신문왕 때 온천으로 유명한 장산국(혹은 내산국)이 있었다', '동래현의 별칭이다'고 소개한다.

기록들은 장산국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으나, 손에 잡히는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셈이다. 사람들은 그 고대국가가 그리워 스토리텔링을 하기 시작했다. 2013년 9월 해운대구는 '해운대-장산국 이야기'라는 창작 오페라를 제작해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은 장산 일대에 전해지는 '고씨 할매' 설화를 모티브로 장산국의 여왕 고아진과 그녀를 지키는 최윤후 장군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뤘는데, 예상외로 반응이 좋았다. 장산국 설화를 스토리텔링 한 닥종이 인형도 등장했다.

부산도시철도 2호선의 동쪽 시·종착역인 장산역은 장산국의 혼을 깨우는 플랫폼이다. 장산역에서 장산국을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가슴 뿌듯한 일이다.

정처 없는 고대사 한 움큼과 고씨 할매 설화를 걸망에 담아 이른 아침 도시철도를 타러 간다. 장산역은 1면 2선의 섬식 지하 승강장(아일랜드형)이다. 섬식 승강장은 이쪽 저쪽으로 가는 열차를 원하는 대로 탈 수 있다. 열차를 잘못 타거나 내려도 추가요금이 발생하지 않는다. 섬식 승강장은 어느 쪽에서든 타고 내릴 수 있어 승객의 착각과 실수까지 받아주는 너그러움이 있다.

장산역 출발 열차가 차임벨과 함께 미끄러져 들어온다. 문이 열리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열차로 밀려든다. 젊은이들의 몸에 바다냄새가 묻어 있다. 바닷바람이 한바탕 들이닥친 듯 열차 안에 푸릇푸릇한 기운이 돈다. 해운대 바다에서 아침산책을 한 건가, 조깅을 한 건가. 일상의 싱그러움을 싣고 열차는 힘차게 떠난다.

#그린 동서선


	도시철도 2호선 호포역 승강장의 끝자락. 부산교통공사 제공

부산도시철도 2호선은 부산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동서선(東西線)이라 했다. 2호선의 상징색은 그린이다. 정확히는 연두색(Yellow Green, 軟豆色)이다. 연두색은 노랑과 초록의 중간색, 이를테면 연한 콩의 색, 녹두색을 말한다. 연두의 색체 이미지는 휴식, 편안함, 신선함이다. 뿐만 아니라, 위안과 피로 회복, 스트레스 해소의 효과까지 준다니 색 중의 색이라 할만하다.

2호선은 바다에서 강으로 가는 연둣빛 급행 열차다. 해운대 바다 기운을 싣고 칙칙폭폭 달리다 보면 어느샌가 북구 금곡역에 닿는다. 여기선 낙동강이 와락 안겨든다. 도시철도에서 낙동강의 늠름한 위용과 강바람을 마주하는 기분은 짜릿하다 못해 황홀하다.

2호선은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에서 3번째로 건설된 도시철도 노선이다. 1999년 6월 30일 최초로 호포~서면 구간이 개통되었고, 연장 구간이 열려 해운대 장산역에서 부산 시역을 넘어 양산역까지 이어졌다. 2호선은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에서 건설된 노선 중 총 연장이 45.2㎞로 가장 길다. 부산도시철도는 남북을 꿰는 1호선과 동서를 잇는 2호선이 만나 역 만자(卍)의 선형을 완성한다. 1, 2호선이 만드는 역 만자(卍)는 부산의 기축 노선이다. 시민들의 일상은 주로 기축 노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도시철도는 온갖 군상들을 불러모아 매일 매일 삶의 거대한 플랫폼을 만든다.

2호선의 역은 모두 43개다. 1호선(32.5㎞) 34개, 3호선(18.1㎞) 17개, 4호선(12㎞) 14개에 비해 월등히 많다. 역명은 '역명심의위원회'에서 정하며, 대부분 지역성과 향토성이 반영돼 있다. 2호선의 역 이름들을 두루 꿰어본다.

장산~중동~해운대~동백~시립미술관~센텀시티~민락~수영~광안~금련산~남천~경성대·부경대~대연~못골~지게골~문현~국제금융센터·부산은행~전포~서면~부암~가야~동의대~개금~냉정~주례~감전~사상~덕포~모덕~모라~구남~구명~덕천~수정~화명~율리~동원~금곡~호포~증산~부산대양산캠퍼스~남양산~양산.

#역, 삶의 플랫폼


	낙동강이 보이는 도시철도 2호선 금곡역.

역(驛, station)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이용해온 교통시설이다. 옛날에는 역마(驛馬)를 갈아타는 곳이었고, 인마(人馬) 또는 마차(馬車)가 머무르며 통신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파발제를 도입해 역과 같은 곳을 참(站)이라고 불렀다. '한 참 간다'라고 할 때의 참은 보통 역과 역 사이의 거리인 30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오늘날에도 역의 의미와 기능은 옛날 못지 않게 중요하다.

도시철도는 역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역명을 지을 때는 각종 민원이 쏟아진다. 다툼과 마찰도 다반사다. 역세권이란 신조어는 도시철도가 바꾸어놓은 시민들의 새로운 생활패턴을 웅변한다. 건물이나 아파트를 지을 때면 으레 '도시철도역에서 ○분 거리'라는 식의 홍보문구가 붙는다.

역명은 기존의 동명(洞名)이나 명소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지만, 간혹 옛 이름을 차용하기도 한다. 못골, 지게골, 율리, 동원 같은 역이 그러하다. 못골은 옛날 대연동 일대에 큰 못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지명. 지게골은 문현교차로에서 대연동 넘어가는 고개의 골짜기 잔등 일대로, 밖과 안을 연결시키는 문이란 의미라고 한다.

금곡동 율리(栗里)는 밤나무가 많아서 밤나무골이라 불렸던 곳. 여기서 신석기 시대 조개무지(패총)가 나왔다. 동원마을에서 유래된 동원(東院)역은 조선시대 세곡 수송을 위한 수참과 왜인들과 무역하던 나루터가 자리했던 곳이다. 모덕역은 모라와 덕포에서, 문전역은 문현과 전포에서 한 글자씩을 따 역명을 지었다. 문전역은 현재 국제금융센터·부산은행역으로 바뀌었다. 역세권 개발에 따른 변화다.

2호선에서 수영, 서면, 사상, 덕천역은 환승역이다. 서면역에서 1호선과, 수영역과 덕천역에서 3호선과 만나고 사상역에서 부산김해경전철로 갈아탈 수 있다. 서면은 부산의 알아주는 도심이지만, 수영, 사상, 덕천은 도시철도가 놓이면서 급부상한 신흥 중심지다. 시민들은 환승역 주변에서 주로 약속을 하고 볼일을 본다. 환승역이 도시의 생활·시간·공간 구조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문화가 있는 도시철도

장산서 출발한 열차는 해운대 동백 센텀시티 민락역을 지나 수영역에 닿는다. 3호선은 2호선 아래에 놓여 있다. 수영역은 조선시대 수군절도사의 군영을 의미하는 수영(水營)에서 유래한다. 수영역 2번 출구로 나가면 수영사적공원이 있다. 조선 효종 3년(1653)부터 갑오경장 때까지 경상좌수영이 있었던 곳이다.

수영역 구내에는 '쌈'이라는 문화매개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매주 화요일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하나의 주제를 걸고 수다를 떠는 '쌈수다'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올해 말이면 300회에 다가간다. 지속적 운영 성과도 놀랍지만, 부산에 이렇게 다양한 문화예술 관련 기획자·제작자들이 있었나 싶어 뿌듯하기도 하다. '쌈수다 네트워크'는 그 자체로 도시철도의 의미있는 문화 풍경이 되었다.

도시철도 2호선 플랫폼 벽면 곳곳에는 시와 이야기가 걸려 있다. 다른 도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이색 풍경으로 문화적 감성과 여심(旅心)을 자극한다. 해운대역 스크린도어 벽면에는 글과 그림이 절묘하게 배합된 스토리텔링 보드가 부착돼 있다. 부산교통공단 지원으로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가 제작했다.

'海雲臺: 최치원이 쓰자 해운대가 되었다/ 이윽고 그는 바다가 되었고/ 구름이 되었다'.

'세 개의 보름달 하나의 사랑: 밤하늘의 달/ 바다에 비친 달/ 연인의 눈동자에 비친 달// 세 개의 보름달에 소원을 빌면/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

'시가 있는 부산도시철도'는 도시철도 승강장 등에 유명 시인들의 시를 게시한 시화 전시물이다. 열차를 기다리는 3~5분 사이에 읽을 수 있게끔 이해가 쉽고 짧은 시들을 엄선해 전시하고 있다. 유명 시인들의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공모를 통해 선정된 독자 시도 걸려 있다. 다만, 같은 시가 너무 오래 부착돼 신선함이 떨어지는 게 아쉬움이다.

해운대역과 광안역에는 열차가 들어올 때 울리는 차임벨이 특이하다. '끼룩 끼룩~' 갈매기 소리다. 부산의 시조(市鳥)가 퍼득이며 노래하는 듯하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10월이면 도시철도에 영화 전용칸이 만들어진다. 영화도시 다운 문화콘텐츠라 하겠다.

#산과 강, 바다를 싣고

부산도시철도 전동차 안은 늘 도시의 일상과 자연의 기운이 넘실거린다. 자연은 산과 강, 바다에서 스며든 기운이다. 이 기운은 도시철도 2호선에서 구체적으로 감지된다. 장산과 해운대역에서 바다 기운을 실은 전동차는 수영, 대연, 서면, 사상, 구포를 지나며 황령산과 금정산의 기운을 싣고 금곡역에서 비로소 낙동강과 조우한다.

부산의 전동차 안은 이렇게 승·하차한 산과 강, 바다의 기운이 뒤섞여 부산을 그야말로 '다이내믹하게' 만든다. 전동차 안에서는 가끔씩 투박한 부산 사투리가 '난투극'을 벌이기도 한다. 그것마저 정겨운 구경거리가 되는 곳이 도시철도다. 여름철 해수욕장과 가까운 역에 이르면 이게 전동차인지, 가족 버스인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젊은이들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고, 젊은 엄마는 아이를 업고, 할머니는 손주를 무릎팎에 앉히고, 형님은 동생을 보듬고 수다를 떨거나 정겨운 눈빛을 주고 받는다. 도시철도 2호선의 '도시 가족적인' 여름 풍경이다.

달리다 보니 어느덧 금곡역이다. 가슴이 툭 트인다. 도시철도 역에 내려 이렇게 가슴이 트이는 느낌을 주는 곳도 세상에 없으리라. 강원도 태백에서 1300리 흘러온 낙동강의 너른 품과 유장한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강을 따라 경부선 철길이 흐른다. 쏴~ 쇳소리를 뿌리며 KTX 열차가 지나간다. 강이 지척이다. 귀를 기울이면 강물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어느새 호포역으로 쑥 올라선다. 호포역은 지상 5층 높이로 국내 도시철도역 중 가장 높은 역이다. 인근에 호포차량사업소가 있고, 부산도시철도에서 유일하게 입식 역명판이 설치된 곳이다.

화명역과 금곡역 호포역에서는 금정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연결돼 있다. 도시철도 1호선 범어사역에 내려 범어사~금정산성 북문~고당봉~호포 새마을~호포역까지 이어지는 등산로(약 9.2㎞, 3시간 30분 소요)는 아주 인기 코스다. 거꾸로 가도 마찬가지다. 도시철도를 이용하는 산꾼들은 표정부터 다르다.

양산역은 2호선의 시·종착역이다. 호포에서 고작 8㎞를 더 가 양산까지 이어졌을 뿐인데, 부산 시역이 흠씬 넓어지고 부산과 경남이 한층 가까워졌다. 부울경 화합을 이야기하는 백마디 말보다 도시철도 양산역 연장이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것 같다. 양산에 어떤 역사가 있는가. 양산시립박물관에 가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양산역 구내에는 도시철도 손님들을 양산시립박물관으로 유인하는 유물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북정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조총, 부부총의 유물이다.이 유물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양산역은 길손들에게 역사의 비밀을 풀어보라고 채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