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 전 경북 살던 12살 소년
- 굶주림 피해 부산항서 선원 생활
- 日화물선서 일하다 英 런던 정착
- 현지 국적 취득·부인 딸도 얻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지난해 7월 말께 경북 경산의 한 중학생이 성적표를 위조한 사실 때문에 부모에게 야단맞을 것이 두려워 무작정 부산항으로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연안부두 쪽으로 갔지만, 뱃길은 없고 주머니 사정마저 여의치 못한 처지라 몰래 찾아든 곳이 국제여객터미널이었다. 그는 보안철책을 넘어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는 여객선에 겨우 몸을 싣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일본 근해에서 이 배의 선원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밀항이 뭔지도 모르는 그는 자기가 시도한 행위가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으리라.

1910년께 부산항 제1잔교 앞의 선박계류장. 많은 범선과 바지선이 줄지어 계류되어 있다.

이처럼 부산항은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마치 구원과 희망을 안겨주는 피안의 공간으로 인식되곤 한다. 그래서 탈출구를 찾는 이들이 종종 부둣가로 찾아드는 것 같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구한말 무렵의 일이다. 경북 청송의 한 마을에서 12살 된 소년도 굶주림을 피한답시고 무작정 찾아 내려온 곳이 역시 부산항이었다. 며칠간 부둣가를 헤매다가 겨우 입에 풀칠할 만한 일자리를 찾았으니, 예인선의 화부(火夫) 자리였다. 그 자리는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계속 석탄을 나르는 힘겨운 일을 해야 하므로 아무나 달려들 일자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나이에 비해서 기골이 장대하여 그 정도 일은 거뜬히 해낼 수 있었다.

어느새 4년이란 세월이 흐른 1911년, 그는 일본우선(日本郵船) 소속 화물선의 기관부 견습선원으로 발탁되어 꿈에 그리던 뱃사람이 되었다. 그러던 그가 나이 22살 되던 해에 모처럼 영국까지 가는 긴 항해 길에 올랐다. 일본 고베항에서 출항한 화물선은 석 달 후에 런던항에 닻을 내렸다. 10여 일간 하역작업을 마치고 본선이 막 출항을 앞두고 있을 무렵에 그는 선장실을 찾았다. 그동안 세계 여러 항구를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보는 안목이 넓어진 그는 평소 하급선원 생활을 하는 자기의 봉급이 너무 적다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그 당시 갓 들어온 일본 선원의 봉급이 5원인데 비해 자기는 6년이나 되는 경력직인데도 2원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임금을 착취당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본인 선장에게 급료인상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런데 선장은 식민지 조선의 하급선원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그는 젊은 혈기에 그만 무단 하선을 하고 말았다. 일본 선장은 마침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를 홀로 영국부두에 남겨둔 채 출항해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10년 전, 부산 부둣가에 나타난 산골 소년의 신세가 낯선 런던항 부둣가에서 더 비참한 모습으로 재연되고 있었다. 그래도 부산에서야 말문이라도 통했지만, 영국은 사정이 달랐다. 졸지에 국제 미아 신세가 된 조선 청년은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세상일이란 게 궁하면 통하게 되어 있나 보다. 1917년 당시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다행히 선원으로 일자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후 그는 영국의 기선회사 등지에서 50여 년을 뱃사람으로 일하면서 그동안 국적도 취득하고, 55살에 영국인 부인을 얻어 딸까지 낳았지만, 일찍 여의는 바람에 아픔 또한 컸다. 이처럼 한 순간의 무단 하선이 연고도 없는 나라에서 세기의 풍운아로 살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가 바로 부산 부둣가에서 잔뼈가 굵은 조남해(趙南海). 그는 본의 아니게 해외로 송출된 최초의 마도로스가 아니었는가 싶다.

부산세관박물관장